문화/음악여행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2집 (1972)

날으는종이배 2005. 8. 29. 21:49
album review
vol.4/no.20 [20021016]


양희은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2집

유니버어살(KLS 40), 1972

김필호 antioedipe@hanmail.net | contributor
서정성과 민중성의 아름다운 공존

난장이의 딸은 팬지꽃이 피어 있는 두어 뼘 꽃밭가에서 줄 끊어진 기타를 쳤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낙원구 행복동이란 반어적인 이름이 붙은 무허가 철거촌 뒷마당에서 줄 끊긴 기타를 치던 그녀의 소설 속 이름은 영희였지만, 그 어렴풋한 가상의 풍경에 늘 겹쳐 떠올리게 되는 건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젊은 양희은의 모습이다. '고운 노래 모음'이라는 제목을 달고 양희은의 첫 두 음반이 나온 뒤로부터 정확히 인구학적 의미에서의 한 세대가 지나갔다. 즉, 당시 그녀의 노래를 즐겨 들었던 이들은 이제 노년의 문턱을 바라보는 처지가 되었고, 그 무렵 비로소 태어난 이들은 이제 청년기의 끄트머리에 붙어서 있다. 먼 옛날 같은 이야기지만, 그 시기를 '경제 기적의 신화' 따위의 이름으로 미화하며 죽은 독재자의 망령을 불러내려는 굿거리가 판치는 현실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새삼 절실한 것으로 만든다.

일천구백칠십년대. 조세희는 소설에서 사이먼과 가펑클의 '침묵은 암세포처럼 번진다'("Sound of Silence")는 가사가 불온하게 들리던 상황을 이야기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아침 이슬")나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죠'("작은 연못") 같은 은유와 우의(寓意)는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되었고, 따라서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불렀던 고운 노래들은 본의든 아니든 1970년대 저항 가요의 대명사가 되었다. 곱고 아름다운 것들이 빈곤과 억압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지 않았던 '그 시절'의 미학은, 다분히 도회적이고 엘리트적인 형식과 민중적인 내용이 어울리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문학에서 조세희의 '난장이' 연작이 파격적인 서사구조와 문체 실험을 통해 자본주의 산업화의 어두운 면에 대한 사실주의적 고발을 혁신했다면, 이미 그보다 몇 년 앞서 대중음악에서는 미국 모던 포크의 영향을 받은 일단의 통기타 가수들이 현실의 문제들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아침 이슬"을 포함한 세 곡 외에 나머지는 모두 번안곡으로 채워진 양희은의 1971년 첫 음반이 보여주듯, 이들 대학가 출신 포크 가수들은 적어도 초창기에는 '외국 문물'의 수입과 모방으로부터 시작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채 1년도 못되어 내놓은 '고운 노래 모음 2집'에서는 거꾸로 창작이 아닌 곡이 "아름다운 것들"과 "저 부는 바람", 그리고 고전 동요 "등대지기"의 셋에 그친 걸 보면, 모방에서 창작으로의 진화는 꽤나 신속하게 이루어진 편이다. 그 과정은 또한 느슨한 의미에서 일종의 집단 창작이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김민기-양희은의 파트너쉽을 보완해 온 '얼굴없는' 작곡가 김광희의 기여는 꾸준하고, 조영남, 이수만, 그리고 이후 코미디언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된 고영수의 우정출연("인형")은 당시 청년문화의 생기어린 단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재즈 음악인들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60년대 후반부터 재즈 악단을 이끌었던 정성조는 플룻, 피아노, 베이스, 드럼의 4인조 편성으로 이 음반과 그보다 약간 앞선 김민기의 데뷔 음반에 반주를 제공했다. "그 사이"와 같은 곡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이들의 기여는 '바람'의 심상을 통해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표현하고자 했던 포크의 감수성을 쿨(cool) 재즈의 어법과 절묘하게 결합시킨 데 있다. '호롱불'이나 '오두막' 등의 시골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그 사이"는 다른 아무런 보탬 없이 통기타 반주만으로 부른다면 흔한 캠프 송에 지나지 않을 것 같지만, 플룻의 유려한 선율이 끼여들기 시작할 무렵이면 음악은 이미 갈댓잎을 떠난 바람처럼 머물지 않고 그저 '열릴 듯 비껴가는' 사이에 있을 따름이다.

김민기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1977)의 전편에 해당할 법한 "서울로 가는 길"은, 병든 노부모를 시골에 버려두고 돈 벌러 서울로 떠나는 딸의 심경을 그린 가사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차라리 한(恨)어린 민요풍의 접근이 적절할 것 같지만, 양희은의 청아한 목소리는 정성조 쿼텟의 부유하는 사운드에 기대어 C-G-C-F-G 진행이 내포하는 막연한 희망과 Dm-G-E-Am의 애상 사이를 오간다. 한편 '허무'나 '번민' 따위의 말들과는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3박자의 왈츠 리듬을 적절히 활용하는 "아무도 아무데도"는, 당시의 대학생-청년 영화들에서 자주 형상화된 '고뇌하는 젊은 지성'의 속내를 드러낸다.

이 음반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는 "작은 연못"과 "백구"는 정성조 쿼텟의 도움 없이 두 대의 어쿠스틱 기타 합주에 주로 의존하는데, 오른편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것이 김민기의 사운드이고, 왼편은 강근식의 것이다. 정성조와 마찬가지로 재즈 음악인 출신으로 이후 한국 포크 음악에 큰 영향을 미친 강근식은, 군 복무중 휴가를 틈타 녹음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기타가 들려주는 유려하고 청명한 톤은 김민기의 절제되고 단아한 연주와 좋은 대조를 이루는데, 특히 "백구"에서 그의 즉흥 연주는 화음이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는 김민기의 술회에도 불구하고 한국 포크의 음악적 성취 중의 하나로 꼽히기에 모자람이 없다.

1970년대 청년문화의 배경에는 도시화, 산업화, 대학생 층의 폭증, 농촌 공동체의 몰락과 대도시 빈민촌의 난립 등이 맞물려 있었다. 그 시기의 초입에 나온 양희은의 노래들은 주위의 혼돈과 비참으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려 하지 않지만, 그 속에서도 다른 무엇보다 천진한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소리로 들린다. 마치 난장이 일가의 꿈이 불도저에 밀려 갈갈이 찢겨나가기 전, 팬지꽃 틈에서 기타를 치던 영희처럼. 이후 수많은 곡절을 거치면서 한국 포크는 거칠게 말해 '서정성'과 '민중성'의 두 요소로 분해되지만, 이 음반은 양자가 공존했던 그리 길지 않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담고 있다. 20021015

* 덧붙이는 말: 이 음반에는 두 개의 미스테리가 있다. 먼저, 음반 표지 뒷면에 '"저 부는 바람"과 "등대지기" 그리고 "가난한 마음"을 빼놓은 거의 모든 노래들은 김민기 군이 만든 것입니다'라는 친필 문구가 적혀 있는데, 막상 "가난한 마음"은 이 음반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 곡이 수록된 음반은 양희은의 [고운노래 모음 제3집](유니버살, KLS-71)인데(B면 세 번째 곡) 인데, '제 3집' 음반은 '제 2집' 이후 발표된 '신중현 작품집'에 수록된 곡과 다른 곡들을 뒤섞은 '짬뽕' 음반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음반 표지에 적혀 있는 수록곡의 리스트와 실제 LP의 수록곡 리스트가 다르다는 점이다. 실제로 재생되는 트랙의 순서는 LP '라벨'에 적혀 있다. 이런 점이 음반의 '버전'(초반, 재반...)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음을 밝혀 둔다.

수록곡
Side A
1. 아름다운 것들
2. 그 사이
3. 서울로 가는 길
4. 인형
5. 저 부는 바람
Side B
1. 새벽길
2. 백구
3. 등대지기
4. 아무도 아무데도
5. 작은 연못
* 음반 표지에 기재된 수록곡 순서
Side A
1. 그 사이
2. 인형
3. 서울로 가는 길
4. 저 부는 바람
5. 작은 연못
Side B
1. 백구
2. 새벽길
3. 등대지기
4. 아름다운 것들
5. 아무도 아무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