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지금!’의 자기실현으로 빚은 마키아벨리안 무예 철학 사후 30년이 지나도록 인기가 식지 않는 이소룡. 무술인으로만 알려진 그가 상당한 경지의 철학도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실전무술인 절권도는 그의 철학적 과제인 자기구현의 결정체였다. ‘이소룡’은 이제 유행이 아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고전이다.
젊음과 도전, 그리고 강인함과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추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의 이름은 언제까지나 기억될 것이다.
▼운영자 알림: 이글은 이송준 도서출판 인간희극 대표(humancomedy@paran.com)가 시사월간지 신동아에 기고한 것을 요약한 것입니다. 전문은 현재 발매중인 신동아 9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소룡이살아 있다면 올해로 65세가 된다. 환갑을 훌쩍 넘어선 그의 모습은 어떨까? 두루뭉실 살이 붙은 몸집,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 깊게 팬 주름….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의 늙은 모습은 이렇듯 상상하기조차 싫다. 그는 여전히 푸른 기운을 내뿜는 젊은 모습 그대로 우리 곁에서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소룡이 말 그대로 ‘급사(急死)’한 것이 1973년, 올해로 32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요즘도 인터넷 인물 검색순위 상위권에 올라 있고, 잊을 만하면 세계 각국에서 그에 관한 기사가 쏟아진다. 지금 당장 아무 포털 사이트에 가서 검색창에 ‘이소룡’이라고 써보길. 최근에 씌어진 글이 오늘 아니면 어제 날짜일 테니까. 심지어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종격투기 관련 게시판에서 표도르나 크로캅 같은 최강의 격투기 고수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자칭 ‘격투기 전문가’들의 상세한 해설과 함께.
‘이소룡의 스피드라면 표도르도 5초 안에 끝낼 수 있다’ ‘이소룡의 펀치 강도는 타이슨의 1.5배쯤 된다’ ‘이소룡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왜소한 체구 때문에 지금의 파이터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살아서 한 세대, 죽어서 한 세대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소룡. 그러나 그는 살아서 한 세대, 또 죽어서도 한 세대에 존재한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소룡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는 이유는 뭘까.
죽은 지 32년이 지나도록 자신을 평온하게 잠들게 내버려두지 않는 ‘우리’에게 이소룡은 과연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환상이나 이미지를 좇지 않고 바로 지금의 삶, 실재하는 가치를 추구했던 그의 철학을 떠올려볼 때 아마도 그는 그리 유쾌한 기분만은 아닐 것이다.
‘아니 갑자기 웬 철학?’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모르는 사람은 통 몰랐겠지만, 이소룡은 워싱턴주립대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틈날 때마다 다양한 철학서를 열성적으로 읽었던 독서광이다.
특히 도교와 선불교, 명상철학에 조예가 깊어 이와 관련된 독창적인 사상을 피력한 저작물을 남긴 철학자이기도 하다. 동양철학에 정통한 도올 김용옥 선생도 이소룡을 두고 ‘퍽 깊이 있는 사상가’라고 평했을 정도니 그만 어리둥절함과 의구심을 거두시라.
여기 당신들이 잘 안다고 생각하는 한 남자의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가 있다.
원래 꿈은 의사 이소룡, 아니 이진번(李振藩·이소룡의 본명)은 1940년 11월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홍콩의 경극 배우이던 아버지 이해천이 식구들을 이끌고 미국 순회공연을 하던 중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발이 묶이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원정출산’을 한 셈이다. 이소룡의 영어 이름인 ‘브루스(bruce)’는 미국 시민권을 발급받기 위해 출생신고를 하는 과정에서 병원 분만실 간호사가 급조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브루스 리’라는 이름이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니 이름 모를 간호사의 작명 솜씨가 그리 나빴던 것 같지는 않다. 뜻하지 않게 길어진 이소룡 일가의 미국 생활은 1947년 이소룡이 일곱 살이 되던 해 가족이 모두 홍콩으로 돌아오면서 끝이 난다.
유년시절의 이소룡은 잘나가는 말썽꾸러기의 모습이다. 아버지의 인맥 덕분에 여러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했는데 ‘세로상’이라는 영화에서 ‘이소룡(李小龍)’이라는 예명을 얻은 이후 줄곧 이 이름으로 활동한다. 꽤 알려진 아역스타였던 데다가 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서 태극권을 배우고 13세부터는 영춘권의 대가인 엽문으로부터 쿵푸를 배운 그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들과 싸움을 벌였다. 천성적으로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 그는 철저한 싸움꾼 기질로 골목대장 노릇을 제대로 했다. 거울 앞에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멋을 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아이, 홍콩 차차 댄스 콘테스트에서 우승할 정도로 끼가 많은 아이였다. 1959년 19세의 나이로 혈혈단신 미국행을 결심한 이소룡은 자신의 앞날에 대해 자못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뜻밖에도 그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당신을 전혀 모르는 제가 이런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을 무례라고 생각지 말아주세요. 먼저 제 소개를 드릴게요. 저는 내년에 고등학교를 마치면 미국으로 건너갈 예정입니다. 의사가 되는 게 제 소망인데요, 그 길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의사가 될 수 있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저는 그 분야에 대해선 눈곱만큼도 아는 게 없는데, 그래도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의사가 될 수 있겠죠?’
알려지지 않은 조언자에게 보낸 이 편지를 보면, 이소룡은 말썽 많던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미국에 가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미국의 주류사회에 정착하고자 굳게 맘을 먹은 듯하다.
그가 의사의 꿈을 접고 워싱턴주립대 철학과를 택한 이유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어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전공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지도교수는 ‘너같이 캐묻기 좋아하는 사람은 철학을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말했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철학은 너에게 대답해줄 거야.”
“내가 철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은 어린 시절 나의 호전적인 성격과 무척 관련이 깊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던지곤 했다. ‘승리 뒤에는 무엇이 오는가’ ‘사람들은 왜 그토록 승리를 갈망하는가’ ‘영광이란 무엇인가’ ‘영광스러운 승리란 어떤 것인가’….”
‘승리 뒤에는 무엇이 오는가’ 이소룡은 쿵푸를 널리 알리기 위해 미국 각지에 쿵푸 도장을 운영할 계획을 세우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한다. 미국에서 태권도 마스터로 인정받는 이준구 사범과의 우정은 이처럼 같은 꿈을 꾸던 젊은 무도인으로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영화는 따로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미국 액션영화 시장에서 무예영화라는 완전히 새로운 트렌드를 만드는 것이다. 아마도 권총잡이들의 무용담보다 훨씬 재미있고 흥미로울 것이다. 서부영화에서는 오로지 총만 다루지만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다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육체로 표현될 것이다.”
그가 연기에 대해 남긴 글들을 읽어보면 또다시 전율이 느껴진다. “20년이 넘는 배우 생활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배우는 죽도록 힘들게 일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것을. 이 사실을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육체와 영혼을 사로잡는 자기표현의 예술가가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에게 배우란 ‘그 사람이게 하는 모든 것의 합’이다. 인생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이해력, 특유의 취향, 행복과 고난의 경험, 집중력, 교육배경 등 그 사람이게 하는 모든 것이 합쳐져 나오는 것이 바로 연기다.”
용의 기운과 같은 자기실현 욕구 그는 1973년 ‘용쟁호투’ 녹음 작업 직후 여배우 정패의 집에서 쓰러져서는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사망원인은 특정 약물에 대한 과민증으로 인한 뇌수종으로 밝혀졌지만 정패의 집에서 죽은 것을 두고 복상사했다느니, 아들 브랜든 리까지 이어진 죽음의 고리를 두고 집안에 씐 저주 때문이었다느니 소문이 많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마지막 숨쉬는 순간까지 자기실현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던 한 순수한 영혼에 대해 산 자들이 덧붙인 군더더기일 뿐이다.
이소룡은 스스로 철학으로 계몽됐다고 말할 만큼 다양한 철학사상을 열성적으로 탐구했다. 그의 서재에는 동서양,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철학서가 빼곡했으며 바쁜 촬영일정 속에서도 틈이 날 때마다 열성적으로 책을 읽거나 순간순간 떠오르는 철학적 영감을 메모로 남겨뒀다. 특히 탐독했던 책들을 살펴보면 그가 지향한 철학적 이상향을 대략 짐작할 수 있는데, 노자(老子)의 도덕경,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제임스 앨런의 명상 서적 등이 그것이다.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스티브 매퀸의 회상은 이소룡이 무엇을 위해 짧은 삶을 불태웠는지 잘 말해준다. “나는 이소룡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해 탁월한 견해를 보여준 철학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무엇보다 ‘나, 이소룡은 누구인가?’를 탐구하는 데 몰두했다. 그리고 앎을 통해 새로운 지식으로 자신을 확장하려 했다. 이소룡과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장시간 토론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하곤 했다.
실제로 이길 수 있는 싸움기술 이소룡은 자신의 철학적 깨달음과 무예기술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가 남긴 수많은 철학 아포리즘은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 진리의 핵심을 정확하게 제시하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방식으로 생각을 진전시키게 자극한다. 주로 아포리즘이란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남긴 것은 ‘거짓 스승은 화려한 말을 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죽음이 두렵지는 않다. 나는 내 삶을 살아갈 것이고 멈추지 않을 것이며 전진할 것이다. 비록 내가 품은 모든 야망을 이루지 못한 채 언젠가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나는 내 모든 성의와 능력을 다 바쳐 내가 원하는 것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보스니아에 세워지는 이소룡 동상 올해 홍콩에서는 11월27일 이소룡 탄생 65주년을 맞아 높이 2m 정도의 이소룡 동상이 세워진다고 한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이소룡 동상을 세우겠다고 발표한 도시가 있다. 뜻밖에도 민족·종교 갈등이 끊이지 않는 보스니아의 모스타르시다. 모스타르시 시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이소룡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간디를 제치고 보스니아의 모든 민족으로부터 환영받는 동시에 민족간의 연대를 상징하기에 적절한 인물로 뽑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스타르 시민은 이소룡을 우정과 고귀함, 정의의 상징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이는 이소룡이라는 인물이 전세계적으로 얼마나 폭넓게, 그리고 얼마나 촘촘하게 강인한 인상을 남겼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서구인에게 각인된 그의 이미지는 너무도 강렬해 그들의 동양에 대한 인식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경제대국 일본의 위상을 능가한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미 한 세대가 지나간 그의 빛바랜 영상을 보는 새로운 세대 역시 이전 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게 이소룡을 소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소룡이라는 유행의 주기는 점점 촘촘해지고 있다. 이쯤 되면 그것은 이제 유행이 아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고전이다. 젊음과 도전, 그리고 강인함과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추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소룡, 그는 영원할 것이다. 글 = 이송준 도서출판 인간희극 대표(humancomedy@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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