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영사운드> 안치행 下
1974년 영사운드는 플루트 주자 왕준기의 가세로 6인조로 거듭났다. 멤버들은 모두 독특한 별명을 지니고 있었다. 리더 안치행은 무대뽀 성격 때문에‘돌팔이’, 올갠 장성현은 대학생같아 보인다고‘학삐리’, 리드 싱어 유영춘은 나이보다 늙어 보여 ‘애늙은이’, 베이스 김희조는 태권도 유단자라‘검은 띠’, 풀룻 왕준기는 성을 따‘왕퉁소’라 불렸다.
다운타운에서는 제법 인기 그룹이었지만 폭넓은 대중의 인기를 얻은 것은 킹박과 작업한 75년 5월 영사운드 1집부터였다. 이 음반은 76년과 10년이 지난 84년에도 재발매가 된 빅히트 앨범. 하지만 2집 발표 후인 75년 9월 멤버간에 내분이 일어났다.
안치행과 박동수 김희조는 그대로 남고 유영춘, 장성현, 왕준기는‘여섯마당’이란 팀을 결성해 독립했다. 당시는 대마초파동 후 공윤의 곡심사 강화로 음반 발표가 힘겨웠던 가요계의 침체기였다. 67년 창단 이래 돈독한 우애를 다져 왔던 팀의 양분 소식에 록 그룹계는 체질 개선 바람에 휩싸였다.
이미 ‘정성조와 메신저스’는 교체를 했고 ‘검은 나비’, ‘조갑출과 25시’ 등도 멤버 교체의 진통을 겪었다. 70년부터 조선호텔 캘럭시, 라이온스와 오비스케빈, 포시즌스를 주무대로 삼았던 ‘영사운드’는 활동을 중단했다. 안치행은 음악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꿈꿨다.
팀 해체 후 안치행은 퍼시픽호텔의 무겐나이트클럽에서 활동했다. 어느날 보사부직원인 후배가 대마초사건에 연루되어 퍼시픽호텔에 숨어있던 이태현을 잡으러 왔다. 그때 제작자인 킹박이 찾아 와 이태현에게 월급 6만원중 3만원을 집어 던지듯 주었다.
음악 친구의 자존심 상하는 모습을 보자 오기가 발동한 안치행은 500만원을 투자해 1976년 신중현의‘더멘’과‘검은 나비’를 거친 김기표, 이태현과 함께 안타프로덕션을 창립했다. 그룹 출신 음악인이 창립한 최초의 프로덕션 탄생이었다. 하지만 곡을 부탁한 작곡가 안길웅이 몇 달을 허송세월하자 직접 ‘오동잎’등을 작곡했다.
최헌과 호랑나비 음반은 제작자로 변신한 그의 첫 작품이었다. 76년 기존 멤버가 아닌 리드 싱어 서정호, 드럼 박훈, 올갠 이정웅, 리드 기타 유현상, 베이스 기타 신병하, 여성 보컬 윤시내의 6인조가 영사운드의 그룹명을 이어받았다. 생음악 살롱 포시즌이 주무대였던 이들은 그룹 포시즌으로 개명을 해 음반을 발표했다.
킹박과 함께 제작한 조용필, 영사운드 스필릿 음반은 훗날 국민 가수로 등극할 조용필의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안치행의 오기가 없었다면 이 음반은 세상 빛을 보지 못할 뻔 했다. 어느날 조용필의 매니저였던 축구 선수 이회택이 찾아와 음반 제작을 부탁했다. 킹박에게 제작을 의뢰했지만 그는 트레이드인 털 하나를 뜯으며“너무 일본놈 스타일이라 안 된다”고 했다. 사실 킹박은 연주자였던 안치행이 제작자가 된 사실이 못마땅했던 것. 하지만 이회택과 약속을 했기에 음반제작을 강행했다.
당시는 일본 조총련 동포들의 고국 방문이 핫 이슈였던 시절. 타이틀 곡‘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원 가사를 시류에 맞게 수정하고 영사운드의 노래를 넣어 2가지 재킷으로 음반을 제작했다. 홍보도 못했던 이 앨범은 부산을 시작으로 100만장이 넘게 팔리는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자신감을 얻은 안치행은 77년 장충체육관에서 입장료 490원의 그룹사운드 경연 대회를 열었다. 대마초에 연루된 조용필의 마지막 무대였다. 다음은 록 그룹 골든 그레입스의 음반. 멤버들은 공전의 히트곡이 될 트로트풍의‘사랑만은 않겠어요’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안치행은 멤버들의 반대에도 리드기타겸 보컬이 된 윤수일을 앞세워‘윤수일과 솜사탕’으로 그룹명을 바꿔 빅히트를 터트렸다.
78년은 안타프로덕션 소속 가수들의 천하. 인순이의 희자매가 중창부문상을 수상하고 최헌은 MBC,TBC 양 방송의 가수왕을 윤수일은 신인가수상, 안치행도‘사랑만은 안겠어요'로 MBC 최고 인기 작곡상을 수상했다. 79년 공연중 가슴이 그대로 노출되어 화제가 되었던 대한극장의 김추자 컴백 리사이틀도 그의 작품이었다. 최헌, 조용필, 윤수일 트로이카외에도 서유석의 ‘구름 나그네’, 김 트리오의 ‘연안 부두’, 주현미의 ‘울면서 후회하네’, 윤민호의 ‘연상의 여인’, 박남정의 ‘아! 바람이여’, 나훈아의 ‘영동 부르스’, 희자매의 ‘실버들’, 문희옥의 ‘사투리 메들리’ 등은 안타 제조기 안치행의 작품이었다.
안타프로덕션은 이름처럼 연속 안타를 쳐, 75년부터 80년대 내내 대중 가요계를 주도하는 제작자로 군림했다. 79년 안치행의 주선으로 유영춘이 리더가 되어 유영준과 영사운드가 재결성되어 79년, 80년 2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최근에도 김상희의 '데킬라 부르스', 최헌의 '돈아 돈아', 윤희상의 '포옹' 등을 작곡한 그는 1998년부터 상호를 사운드코리아로 변경해 운영하고 있다.
2004년에는 신보 ‘심경’을 발표해 화제가 되었다. 반야심경등 불교 경전을 드럼, 기타에 목탁 소리를 뒤섞어 빠른 비트의 경쾌한 힙합음악으로 직접 노래도 불렀던 것.“이제 음반 제작보다는 불교 음악을 젊은 이들에게 알리는 일에 매진하렵니다.” 500여곡을 작곡한 그는 “창작은 마음을 파는 것”이라며 “불교 음악은 궁중 음악 스타일이라 일반대중에게는 먹히지 않지만, 세월이 지나면 합창도 할 수 있게 심경을 편곡해 놓았다”며 향후 음악 탐구의 방향을 슬쩍 들려준다. 최초의 힙합 불경 음반에 대해 젊은 신도는 환영을, 그러나 일부 스님들은 비난을 하는 등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그만큼 그의 신보는 전혀 새로운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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