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영혼을 사로잡았던 70년대 포크계의 선구자
공식 무대에서 시도된 첫 국악 포크였다. “공연 후 무대 뒤에서 한 국악인이 ‘다시는 그런 장난 하지 말라’고 혼을 냈다. 웃어넘겼지만 음악엔 한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험적인 그의 곡은 방송을 거의 타지 못하고 송창식의 노래가 히트되었지만 지금도 그는 당시의 시도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심창균은 당시 보사부장관의 아들. 맷돌 공연이 제약 속에서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역할이 컸다.
1973년 이화여대 강당에서 동료 가수 10여명과 불우 이웃 돕기 공연을 열었던 백순진은 내쉬빌, 르네상스, 르시랑스 등에서 노래와 사회를 보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 갔다. 73년 12월, 백순진, 김태풍과 고 김정호가 한 TV프로에 출연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김태풍이 탈퇴를 하고 김정호가 새로운 멤버가 되었음을 알리는 자리였다.
당시 음악 재능이 뛰어났던 김정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기타 하나를 메고 비원 옆 꽃밭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던 처지였다. 백순진은 동생의 소개로 김정호의 기타 연주와 노래를 듣고 단번에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았다. 김정호의 신기에 가까운 기타 실력을 본 서유석과 특히 김세환은“사부님으로 모셔야겠다”고 감탄을 했다.
멤버 교체된 3기 4월과 5월은 74년 1월부터 KBS TV ‘젊음의 행진’등 방송 출연과 더불어 월 40여 만원의 개런티를 받고 명동 OB'S 캐빈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어느 날 김정호가 펑크를 냈다. 자신의 힘으로 처음 돈을 번 김정호는 부친에게 월급을 자랑하며 가족이 함께 살자고 했다.
하지만 “딴따라 짓 하냐”는 부친의 무시에 좌절한 김정호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던 것. 백순진은 “그의 부친이 음악성을 인정하고 감싸 주었다면 김정호는 정말 한국 음악계의 큰 인물이 되었을 재목이었다”고 지금도 아쉬워한다. 이미 김정호의 재능을 인정한 지구레코드는 백순진을 통해 ‘4월과 5월’의 전속을 추진했다.
하지만 ‘작곡가로도 전속하라’는 조항에 김정호가 반발했다. 또 두 사람은 라이프 사이클이 달랐다. 담배와 대마초 흡연에 대한 간섭이 싫었던 김정호는 이종환의 주선으로 유니버샬과 전속 계약을 맺고 2달 만에 팀을 탈퇴했다. 이에 김태풍이 재 합류하면서 음악적인 변화를 꾀했다.
듀오 활동을 유지하면서 포크 록 그룹 ‘들개들’을 결성했던 것. 라인 업은 서울의대 본과 2학년 민병진(현재 서울치과병원 이사장)이 키보드, 연세대 불문과 3학년 김찬이 드럼, 백순진이 리드 기타, 김태풍은 세컨 기타, 이수만이 리드 보컬을 맡았다. 멤버들은 리더 백순진의 행촌동 집 지하실에 모여 연습을 했다.
당시 개인 녹음실까지 있었던 백순진의 집은 포크 가수들의 아지트였다. 창립 기념공연은 74년 7월 13일 연세대 대강당에서 열렸지만 ‘들개들’은 음반을 남기지는 않았고 ‘4월과 5월’은 74년에 4집까지 발표를 했다. 따라 부르기 쉽고 서정적인 멜로디의 ‘4월과 5월’의 노래들은 젊은 층의 폭발적인 지지를 이끌어 냈다.
대표 곡 중의 하나인 ‘화(和)’와 ‘영화와 함께’는 특별한 사연을 담고 있다. 6년 동안 사귀었던 상명여사대 미술과를 졸업한 당시 백순진의 여자 친구이자 현재의 아내를 위한 애틋한 곡이다. 본명이 ‘영화’는 아니었지만 백순진은 그녀를‘화’라고 불렀고 YMCA 수영장에서 만났지만 음악으로 표현하기 어색해 스케이트 장으로 고쳐 노래를 만들었다.
군사 정권의 장발 단속에 대한 역설적인 풍자를 담은 ‘어떤 말씀’은 암울했던 젊은 층에 속 시원한 통쾌감을 안겨주었던 명곡. 하지만 사회의 부조리를 담은 많은 창작 곡이 심의에서 탈락하자 백순진은 좌절하기 시작했다. 대마초 사건은 해체를 불러왔다.
당시 대마초 흡연을 적극 말렸던 이들조차 새벽 5시에 정보부에 끌려가 무조건 대마초 흡연자 20명을 불어야 했던 현실은 노래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잃게 했다. 이천호텔을 운영했던 김태풍의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어울렸던 포크 가수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아준 포크 음악의 숨겨진 후원자.
당시 이천호텔은 포크 가수들이 음악을 논하고 결속을 다졌던 또 다른 아지트였다. 면목이 없어진 김태풍은 노래를 포기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지금은 서울에서 영어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백순진은 74년 말, 오토프러덕션을 창립 제작자로 변신해 오정선, 영주와 은주, 서미숙, 박형철등을 키웠다.
현재 활동을 하는 4월과 5월의 김영진, 이지민 듀오의 원래 이름은 하야로비. 백순진의 기획으로 4기로 거듭난 이들은 히트곡 ‘장미’로 동양방송 차트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내부 갈등으로 팀을 해체 시킨 아픔을 가지고 있다. 작곡,작사,편곡,판매,홍보 등 일체를 혼자 도맡았던 백순진은 부도를 맞으면서 기흉으로 건강이 나빠져 3개월간 입원을 했다.
그래서 퇴원 후에는 부친의 노스웨스트항공 총대리점인 샤프항공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뉴욕에서 국제 항공업체인 샤프 익스프레스를 운영하며 코알라프로덕션의 고문으로 최근 심수봉의 뉴욕 공연을 주선하며 음악 비즈니스를 재개했다.
백순진, 김태풍의 아름다운 포크 멜로디에 자유로웠던 70년대 젊은 영혼은 없었다. 작년부터 불기 시작한 7080세대 음악 부활 붐 속에 그들을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높다. 김민기, 김의철, 방의경, 현경과 영애, 한대수, 윤연선 등 70년대 중요 포크 가수들의 이름과 음반이 부활되고 있는 지금, ‘4월과 5월’백순진의 음악 활동은 재평가되어야 선구적인 작업이었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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