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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을 넘어선 포크송 올드 팬들에겐 추억 저편에 아지랑이처럼 살아 움직이는 노래가 있기 마련이
다. 그중의 하나.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났던 하얀 그 때 꿈은..." 가수 이름조차 기억속
에서 흐릿하지만 불현듯 뇌리에 떠오르는 이 노랫말과 우수에 젖은 멜로디는 올드 팬들에겐 현재와 과거
를 이어주는 단단한 연결고리와도 같다.

바로 윤연선의 '얼굴'이다.

그녀는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70년대의 전형적 한국여성포크가수 1세대. 본인은 "직업가수도 아니었던
내 노래가 칼럼 소재가 될만한 가치가 있느냐"고 오히려 놀라워 한다.

사실 영화배우인 오빠 윤양하와 성우인 언니가 없었다면 그녀가 인기가수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
로 여전히 감수성 강한 소녀 모습 그대로다.

1972년쯤 포크열풍의 중심이였던 명동의 음악모임에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참여하면서 시작된 그녀의 노
래 여정. 이때 어울린 음악친구는 4월과 5월의 멤버였던 이수만. 함께 방송국 구경을 가 인기 DJ 이종환
과 사귀고 중앙대 학군단 축제에서는 존 바에즈 노래도 불러 보았다.

72년 가을에 나온 데뷔음반은 DJ 이종환의 배려로 이수만과 함께 했다. 이수만이 대학 초년시절에 작곡
한 동요같은 습작들로 채워진 이 음반의 대표곡은 '내마음'. 윤연선 본인도 타워호텔에서 촬영한 음반 자
켓을 본 기억만 있을 뿐 발매사 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단다.

첫 독집앨범 도 비슷하다.

그렇지만 이 음반엔 윤연선의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동아방송 PD 이해성씨의 소개로 2기 '뚜아에무
아'를 결성하기 위해 녹음했던 '님이 오는 소리' '보내는 마음 가는 마음' 같은 숨겨진 곡들이 그 대상이
다.

"화음이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아 발표하지 않았다"는 이필원의 고백에서 보듯 윤연선-이필원의 '뚜아에무
아'는 불발탄으로 끝났지만 우수에 젖은 듯한 두 사람의 하모니는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윤연선- 이필원
의 '뚜아에무아'가 못내 아쉬워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윤연선의 최대 히트곡 '얼굴'은 처음으로 자기의 음악을 내놓고 싶어 적극적으로 찾았던 곡이다. 작곡자
인 동도중학교(당시) 신규복 선생님을 찾아가 학교 강당에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즉석 테스트를 받아가
며 곡을 얻어냈다. '얼굴'은 원래 어린이를 위해 만든 동요였다.

DJ 박원웅이 기획한 <윤연선/박승용-지구JLS120849, 1974년10월11일>은 '얼굴'의 첫 음반이건만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음반이다.

지구레코드 전속악사의 트로트풍 '얼굴'연주와 파트너로 함께 수록된 박승용도 이질감으로 영 못마땅했
다.

깔끔하게 재무장해 발표한 음반이 <고아/얼굴-지구JLS120958, 1975년2월26일>. 타이틀곡은 오세은 편곡
의 '고아'였고 '얼굴'은 2면 머릿곡이었다. '고아'는 광주에서 처음 히트해 서울로 올라왔다.

"방송금지곡으로 묶여 부를 수 없게 됐을 때가 가장 속상했다"고 말할 정도로 윤연선의 최고 애창곡이
다. '고아'의 방송금지조치이후 '얼굴'은 대박을 터트리며 방송과 다운타운가의 주요 레퍼토리로 하루도
빠짐없이 울려 퍼졌다.

당연히 각 방송ㆍ음반사에서 출연 및 음반제작 제의가 밀려들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부담스러웠다고 한
다. 그저 노래부르는 자체가 좋았을 뿐 대중앞에 나서서 직업적으로 노래를 부를 자신도 없고 능력도 없
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홍보하거나 체계적인 음악공부에 몰입하고픈 음악적 갈증보다는 요청이 있을 때
만 고등학교나 대학축제무대에서 노래부르는 것이 마음 편했다.

이처럼 소극적인 윤연선 때문에 속이 탄 지구레코드는 은밀히 금지곡 '고아'를 삭제하고 '얼굴'을 타이틀
곡으로 한 재판을 발매하였다. '왜냐 묻지 말아요'등 4곡을 추가로 수록한 재발매음반은 날개 돋힌 듯 팔
려 나갔다. 그래도 어렵사리 구할 수 있는 재발매판에 비해 '고아/열굴'이 함께 수록된 초판 구경이 만만
치 않은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상상을 초월한 반응으로 지구레코드사 사장은 추가로 음반 취입을 제의하면서 거액의 수고비까지 내놓았
다. 윤연선은 "음반을 내면서 한번도 돈을 들이지도 받지도 않았다.

이때 받은 거액의 수고비는 노래를 한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회고한다. 이후 김의철 곡 '강매'
등으로 녹음준비에 들어갔지만 상업적인 음반관계자들의 작업 환경에 염증을 느껴 도중에 그만둬 버렸다.

나이 50을 바라보는 중년의 윤연선. 요즘은 홍대앞에서 '윤연선의 얼굴'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며 자신의
노래를 기억해주는 팬들의 사랑에 행복해 한다.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엊그제는 떨리는 가슴을 추스리
며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행복의 나라로' 포크30년 기념공연 무대에 나서 25년만에 대중들과 호흡을 함
께 했다.

'얼굴'을 듣던 중년의 관객들은 한 순간 "아! 이 노래가 윤연선의 것이었구나"라며 추억을 되새겼다. 팬
들의 변치 않는 사랑으로 그녀는 이제 '가수였음'을 행복하고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Posted by 날으는종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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