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스 캐빈의 왕자, 영화음악 접수하다
이장호 감독의 [어제 내린 비](1975)는 성공적 데뷔작 [별들의 고향](1974)의 후속작이다. 사실 흥행성으로 보나 작품성으로 보나 [별들의 고향]에는 못 미치는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당시의 청춘 영화가 어떤 것으로 이해되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원작은 단짝 친구 최인호의 세 편의 소설 [정원사], [내 마음의 풍차], [침묵의 소리] 등의 혼합물이며, 1970년대 대표적 모더니스트 작가로 잘 알려진 김승옥의 각색과 조응한다. 적극적이고 분방한 영후(김희라 분)와 내성적이고 소심한 영욱(이영호 분), 이 판이한 성격의 이복 형제가 민정(안인숙 분)을 동시에 사랑하면서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다는 줄거리인데, 실상은 멜로 드라마의 양상을 띄지만, 청년들의 막연한 방황과 반항의 페이소스와, 비극적 감수성으로 충만한 센티멘털리즘과 조우하게 된다(완성도가 떨어지는 부분에 대해 이장호 본인은 사소하게는 동생 이영호의 출연 같은 사적 개입부터, [별들의 고향] 이후 몇 달 만에 급박하게 제작된 연유 등을 들고 있다).
특히 이런 부분은 영화에서 음악과 이미지를 조합시키는 전개 방식을 통해 일어난다. 보통 주제가를 부른 윤형주나 박인희가 잘 알려져 있지만 영화음악의 실제 주인공은 정성조와 메신저스일 것이다([별들의 고향]에서는 이장호-최인호-이장희로, [어제 내린 비]에서는 이장희 대신 정성조로 서울고 인맥이 이어진다는 것은 사족일 듯하다). 한마디로 '재즈에 영향을 받은 록 음악', 다시 말해 재즈에 근간을 두면서 시카고나 블러드 스웨트 앤 티어스 같은 당시 성행한 브라스 록과 접속했다고 하면 단순화된 설명일까. 어쨌거나 이들이 오비스 캐빈과 로얄 호텔에서 활발한 실연으로, [어제 내린 비], [겨울 여자] 등의 영화음악 등으로 기념할 만한 족적을 남겼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 영화의 3대 대표곡은 "어제 내린 비" "사랑의 찬가" "달려서 가네"이다. 특히 윤형주가 부른 "어제 내린 비"와 박인희 윤형주의 듀엣곡 "사랑의 찬가"가 '히트곡'이다. 최인호가 이 세 곡들은 작사했(으므로 어느 정도 영화 내용과 일치하는 가사 내용을 가진)다. 영화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어제 내린 비"와 "사랑의 찬가"는 비극적인 사랑에 대한 애가이며 "달려서 가네"는 질주하는 청년들의 송가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윤형주가 부른 "달려서 가네"는 오프닝 크레딧과 결말에서 거리를 달리는 영후의 이미지 등을 보여준다. "사랑의 찬가"는 윤형주의 목소리를 빌어 영화 속에서 이영호가 부르는 '사랑가'처럼 꾸몄는데 목소리와 입 모양이 불일치하는, 지금으로서는 어이 없는 일도 지나칠 만한 실수로 넘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 앨범의 백미는 사실 이 대중적인 대표곡 이외에 존재한다. 앞서 언급한 대표곡들은 두 세 가지 버전으로 변주되는데, 예를 들어 "어제 내린 비"는 모든 악기로 연주되는 경음악 버전, 플루트 버전, 플루트+기타 버전으로, "달려서 가네"는 봉고 버전, 무그 버전 등으로 주도하는 악기가 변하면서 연주된다. 이런 연주 버전에서 대개 주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는 (많은 그룹에서처럼 기타가 아닌) 정성조의 플루트다. 물론 음과 악구들 사이를 자유스럽고 흐드러지게 오가며 수식하는 악기이기도 하다. 반면 트럼펫 같은 관악기는 대개 음과 악구 등의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호방지게 취주되는 악기가 된다. 다시 말해 트럼펫은 힘 있는 사운드를, 플루트는 부드럽고 우아한 사운드를, 무그는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때때로 무그나 봉고 등이 그 빈 틈을 채워넣는 역할을 한다. 또 한 가지. 영화에서는 삽입되었지만 본 음반에서는 삽입되지 않은 곡이 약간 있다. 예를 들어 형 영후와 민정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게된 영욱이 괴로워하며 담장을 넘어 형의 방으로 가는 장면에서 흐르는 불길한 음형의 사운드가 그것인데, 이런 '불편한' 곡을 음반에 애써 넣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사실 노래의 악곡은 대개 지극히 간단한 구조가 반복되는 형식을 취한다. "어제 내린 비"의 한 절은 단순한 AA'(동요로 치면 "학교 종이 땡땡땡"과 비슷한) 구조인데, 보컬 버전이 3절로 이루어져 있다면 경음악 버전은 그 두 배로 반복되는 구조를 가진다. 경음악 버전에서 단순한 구조의 반복에서 오는 지루함은 변주에 의해 상쇄된다. 처음에는 기타 아르페지오와 영롱한 건반 악기의 선율이 주도하다가, 다음 절에서는 드럼과 베이스가, 그 다음에는 무그와 관악이 차례로 삽입되는데, 이러한 악기 변화는 눈에 확 띄는 역동적인 무드 체인지가 아니라, 은근한 변환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간단한 구조는 영화의 이미지에 집중하게 하기 위한 어법이었을 듯하다.
그렇다면 보컬의 운용은 어떠한가. 대개의 경우 윤형주나 박인희는 투명하고 청아한 음색을 투영한다. 그에 더해 양념 같은 하모니가 추가되는데 예를 들어 "달려서 가네"의 보컬 곡은 윤형주의 메인 보컬과 빠라빠빠빠-하는 배킹 보컬이 교대되며 흥취를 자아내기도 한다. 반면에 최병걸과 조경수는 보다 음영이 드리워진 음색을 발산한다(최병걸의 경우 당시 수많은 레퍼터리를 소화해내었던 명가수로 손꼽히고, 조경수도 훗날 "아니야" 등으로 솔로 가수로 인기를 얻게 된다). 영화에서 영후가 민정에게 호감을 가지며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다방에서 만나던 날 그곳에서 시끌벅적하게 흐르는 "어두운 골목길"과, 영후가 막다른 인생을 사는 생모를 방문하고 나온 후 거리에서 헤매는 장면에서 흐르는 "오후"는 최병걸이 부른 곡들로 최병걸과 메신저스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곡들이 아닐까. 그루브하게 부상하는 베이스 기타와 더불어 관악기나 기타가 간간히 솔로를 연주하면서 충일한 리듬감을 발산한다. 이런 곡들의 가사에는 시적 서정이 드리워져 있는데 "오후"의 경우 "차가운 분노와 뜨거운 눈물이 나를 조그맣게 만들어"라는 가사를 탄식과도 같이 조분조분 곱씹는 보컬은 회한과 슬픔의 정서로 인도한다.
이처럼 매력적인 보컬들과 호흡하며 출중한 기량의 연주가 조율된 이 영화음악 음반은, 정규 음반을 대신해 197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펼친 중요한 뮤지션인 메신저스의 음악적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임에는 틀림없다. 20021108
* 영화 크레딧 원작: 최인호 감독: 이장호 제작: 황영실 각본: 김승옥 촬영: 장석준 음악: 정성조 주제가 : 윤형주 / 박인희 캬스트: 안인숙 김희라 이영호 최불암 도금봉 박미영 연주 : 정성조와 메신저스
* The Messengers 최선배: 트럼펫 장석웅: 기타 보컬 변성용: 오르간 조경수: 베이스 유영수: 드럼 최병걸: 싱어 정성조: 색소폰 플루트
수록곡 Side A 1. 어제 내린 비 - 윤형주 2. 사랑의 찬가 - 박인희 윤형주 3. 달려서 가네 - 윤형주 4. 웃어야 할텐데 - 조경수 5. 달려서 가네 - 정성조와 Messengers (봉고) 6. 어제 내린 비 - 정성조와 Messengers (경음악)
Side B 1. 어두운 골목길 - 최병걸 2. 오후 - 최병걸 3. 사랑의 찬가 - 윤형주 4. 어두운 골목길 - 정성조와 Messengers 5. 어제 내린 비 - 정성조와 Messengers (플룻) 6. 달려서 가네 - 정성조와 Messengers (무그) 7. 사랑의 찬가 - 정성조와 Messengers (플룻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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