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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탄생 65주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오늘, 지금!’의 자기실현으로 빚은 마키아벨리안 무예 철학

시애틀의 한 직업학교에 입학한 그는 홍콩에서와는 전혀 다른 삶에 적응해야만 했다. 홍콩에서는 꽤 알려진 아역스타였지만, 미국에서 그는 백인 주류사회의 편견에 시달리는 왜소한 동양인, 식당 웨이터, 댄스 강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해야 하는 고단한 고학생일 뿐이었다. 이런 환경의 변화 속에서 자의식이 강한 이소룡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성숙했으며 동양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쿵푸 수련에 매진하게 된다. 그리고 ‘나인 나로서 살기 위한’ 그의 끊임없는 고민은 이소룡을 점점 철학이라는 학문으로 이끈다. 그가 의사의 꿈을 접고 워싱턴주립대 철학과를 택한 이유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어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전공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지도교수는 ‘너같이 캐묻기 좋아하는 사람은 철학을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말했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철학은 너에게 대답해줄 거야.”

“내가 철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은 어린 시절 나의 호전적인 성격과 무척 관련이 깊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던지곤 했다. ‘승리 뒤에는 무엇이 오는가’ ‘사람들은 왜 그토록 승리를 갈망하는가’ ‘영광이란 무엇인가’ ‘영광스러운 승리란 어떤 것인가’….”

‘승리 뒤에는 무엇이 오는가’

동양 남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쿵푸 수련에 매달린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이소룡의 유려한 발차기와 왜소하지만 강인한 육체에 호기심을 느낀 사람들은 그에게 쿵푸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고 그 중 한 사람이 훗날 그의 아내가 된 린다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동양무술하면 곧바로 일본의 가라테를 떠올릴 정도로 쿵푸와 태권도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소룡은 쿵푸를 널리 알리기 위해 미국 각지에 쿵푸 도장을 운영할 계획을 세우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한다. 미국에서 태권도 마스터로 인정받는 이준구 사범과의 우정은 이처럼 같은 꿈을 꾸던 젊은 무도인으로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다.

한편 이소룡의 할리우드 데뷔는 그의 무술시연을 눈여겨본 한 영화 제작자의 추천으로 이뤄졌다. 이미 많은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무도인이 되었지만 늘 영화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던 그는 아내 린다, 그리고 두 살배기 아들 이국호(브랜든 리)를 데리고 또 다른 모험의 땅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다. 1965년,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였다. 그 뒤로 이소룡은 여러 텔레비전 시리즈물에 출연했다. 데뷔작은 ‘그린호넷’이라는 시리즈물로 이소룡은 주인공을 보좌하는 ‘가토’라는 일본인 역을 맡았다. 이소룡은 그 무렵을 이렇게 회고했다.

“사람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최악이다. 내가 할리우드에 처음 발을 디딘 1965년, 나는 ‘그린호넷’이라는 텔레비전 시리즈물에 출연했다. 그때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 중에 정작 나, 이소룡이라는 사람은 없었고 단지 로봇 한 대가 있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나인 내가 아니었고 외부적인 안정을 이루는 데에만 골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위적인 시스템과 형식, 고정된 패턴과 정해진 조건에 대해 격정적인 반발심을 보이던 이소룡에게 할리우드의 거대한 제작 시스템은 스스로를 사람이 아닌 로봇으로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영화는 따로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미국 액션영화 시장에서 무예영화라는 완전히 새로운 트렌드를 만드는 것이다. 아마도 권총잡이들의 무용담보다 훨씬 재미있고 흥미로울 것이다. 서부영화에서는 오로지 총만 다루지만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다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육체로 표현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제작자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미국 제작사가 아닌 홍콩의 영화제작사 ‘골든 하베스트’와 함께 자신이 원하던 영화를 찍게 된다. 이소룡 신화의 신호탄이 된 영화 ‘당산대형’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홍콩의 박스오피스 기록을 모두 갈아치우며 크게 흥행한 이 영화는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 관객의 눈으로 보면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부분도 많다. 이소룡의 발차기에 날아간 상대가 창고 벽면에 그대로 형체를 남기며 쓰러지는 만화 같은 장면이 그것이다.

(계속)







Posted by 날으는종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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