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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차 (1/10) 바티칸 천지창조

바티칸은 일찍 가야 한단다. 워낙 사림이 많아서 줄을 많이 서기 때문에 많이 기다려야 한다고 그리고 가이드 투어를 권장한다고, 너무 많아 설명을 듣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는 것이 많다고. 그런가 보다 하고 아침 일찍 출발했다. 어제 전철을 한번 타보았으니 이제는 서툴지 않다. 전철 옆에 온통 그림이다. 외국 벽에 그려져 있는 둥근 그런 그림 이 곳은 벽화가 발달 되어 있어 이렇게 그림을 그려 놓았나 내 눈에는 낙서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침 8시경 역에서 타는 전철은 무척 혼잡하다. 첫 번째 오는 전철은 사람이 많아 못 타고 두 번째 오는 전철을 가까스로 탄다.


이러한 전철에서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말이 생각 났다. 전철을 타고 가만히 보니 옆에 한국에서 가족이 여행 온 팀이 보인다. 4인 가족이다. 무척 복잡한 전철 안에서 갑자기 한국말이 들렸다. 소매치기가 남편주머니를 소매치기하는 장면을 잡은 것 같다. 소매치기는 남편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손에 아무것도 없다는 손짓을 하고 유유히 사라지고 남편은 주머니를 확인하고 버스 표하고 몇 개가 없어졌나 보다. 천만다행이지 중요 것을 잃어 버렸으면 어떡할 뻔 했나. 조심하여야 할 동네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려야 할 곳에 다 왔다. 얼른 내려 사람들 틈에 끼어 바티칸으로 올라 갔다. 중간에 이정표가 있는데 오른 쪽이 바티칸 박물관 같았다. 오른쪽으로 가니 사람들이 기다랗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일찍 올걸 하는 후회가 들었으나 어찌하겠는가. 그런대로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빨랐다. 한국인 관광객도 보였다. 가이드가 이어폰을 나눠주고 있었다. 단체로 가이드 투어하는 팀이다. 나는 종교도 없고 그냥 혼자 보기로 하고 들어간다. 출입구에서 레이져로 짐 검사를 한다. 레이저 통과대를 통과하고 검문검색을 끝나고 들어 간다. 입장료 12유로.

무척 크다. 조각상의 인상이 다 틀리다. 인상을 하나씩 뜯어 보는 것이 재미있다. 특이한 인상은 카메라에 담고 실내라서 잘 나올지 모르겠다.


노 후레쉬로 찍어 약간만 흔들리면 안 되는데 그래도 할 수 없다. 삼각대를 안 가져 왔으니. 그냥 자세를 바로잡고 찍을 수 밖에. 벽에 천장에 온통 그림들이다. 천장의 벽화는 엄청나다. 어떻게 저 많은 그림들을 그려 놓을 수가 있었을까? 한참을 가도 천지 창조가 나오지 않는다. 얼말를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그 곳에서 지키는 아저씨가 노포토 노포토 한다. 사진을 찍지 말라는 말이다. 그 큰방에 사람들이 가득히 서서 구경하고 있고 그 방 벽쪽에는 한 줄로 벽을 따라 의자가 있다. 의자에도 앉을 틈이 없다. 서서 모두 고개를 들고 있다. 천정의 벽화를 보려고 고개가 아프다. 미켈란젤로가 저 것을 그렸단다. 무척 사실적이다.

인터넷에서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는 일을 맡겼다.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작업의 프로그램을 짜고 거기에 따라 일을 진행해나갔다.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천장 밑에 세운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에 물감을 칠해나가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로 인해 목과 눈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혼자서 4년 만에 이 대작을 완성하였다.

이 천장화는 성서의 〈천지창조〉의 순서와는 반대로 노아에 관한 3가지 이야기, 즉 입구 쪽에서부터 그려졌는데, 완성까지는 4단계를 거쳤다. 첫번째 단계는 2개의 곡면 벽화에 그린 3가지의 노아에 관한 이야기와 8명의 나체상으로 1509년 9월 15일에 완성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낙원추방〉과 〈이브의 창조〉, 4명의 나체상, 두 명의 예언자, 4개의 삼각형 벽화, 2개의 곡면 벽화로 1510년 8월에 완성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아담의 창조〉 〈하늘과 물의 분리〉 〈달과 해의 창조〉 〈빛과 어둠의 창조〉의 4가지 이야기와 8명의 나체상, 5명의 예언자, 4개의 삼각형 벽화, 2개의 곡면 벽화로 1511년 1월과 8월 사이에 완성되었다. 네 번째 단계는 나머지 모든 원형 벽화로 같은 해 10월부터 1512년 10월 사이에 완성되었다.

그려나간 순서에 따라 화면은 점점 단순화되어 가는데, 이것은 높은 곳에 그려지는 천장화의 특수성을 미켈란젤로가 차츰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림은 1512년 완성되어 같은 해 만성절인 11월 1일 제막식을 가졌다. 그후 500여 년 동안에 이 벽화는 여러 차례에 걸쳐 덧칠과 복원작업이 이루어졌다. 1982년에는 일본의 한 방송사의 후원으로 최첨단 기법을 동원한 복원작업이 9년에 걸쳐 실시되어 그림을 덮고 있던 때와 후대에 이루어진 덧칠이 제거되어 본래의 색채와 형태가 되살아났다

- 인터넷에서

그리고 산 피에타 성당을 들어 갔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들어간다. 무언가 하고 뒤에 서서 같이 들어가려 하니 입장권을 팔고 있다. 줄에 밀려 입장권을 사서 뭔지도 모르고 들어간다. 6유로 지출. 엘리베이터를 탄란다. 타라니까 타야지 나도 돈 냈으니까? 꽤 많이 올라 가더니 다시 내리란다. 일행들이 내려서 걸어 올라간다. 같이 따라 할 수 밖에, 나도 그 들을 따라 간다. 좁은 곳으로 해서 한참을 올라간다. 올라가도 끝이 없다. 다리도 아픈데 계속 올라가야 하나. 돈 냈는데 여지 없이 떠오르는 본전 생각 나도 끝까지 올라 갔다 하도 좁아서 이곳은 벽 청소를 할 필요가 없겠다. 관광객들이 옷으로 다 닦고 올라가고 있으니. 다 올라가니 성 피에타 성당 옥상이다. 무척 높다. 아래를 보니 현기증이 안다. 올라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바티칸 박물관이 다 보이고 아래 집들도 자 보인다.


날씨도 기가 막히게 맑다. 한 참을 구경하고 나왔던 반대방향으로 다시 내려간다. 다 내려가서 피에타성당에 들어 갔다. 오른쪽에 피에타 조각이 있다. 성모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인데 성모마리아가 무척 젊게 조각을 해 놓았다. 미켈란젤로가 25살 때 만들었다는 조각품 대단하다. 바티칸을 보고 나오니 배가 출출하다. 어디서 무엇을 먹을까 하고 걸어 가다 보니 빵집에 그래도 사람들이 많다.

처음 가 본 곳에서 음식점을 고르는 법.

사람 많은 곳을 선택하라.

사람 많은 빵집에 들어가 맛있게 생긴 빵과 음료수를 시켜 먹어보니 맛이 있다. 탁월한 선택 7.5유로 싼 값은 아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10,000원 정도 그래도 잘 먹었으니 됐다. 식사 후 천천히 천사의 성으로 걸어 간다. 이 곳은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주위에서 건물만 보면 된다고 한다. 가는 길에 강가 벤치에서 산타루치아를 기타로 연주하고 있다 그런데 자주 틀린다. 연주를 잘 하지도 못하면서 나와서 클래식 기타를 치고 있으니 가까이 가보니 지나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앞에 돈 통은 놓여져 있다. 앞으로 연습 많이 하라는 의미에서 주머니에서 잔돈을 꺼내 돈 통에 넣어 주고 사 진을 한 장 찍는다. 못 치는 기타지만 그래도 이태리 와서 고등학교 때 배운 산타루치아를 강가에서 기타연주로 들으니 기분이 묘해진다. 여기가 이태리 맞다.


그 예술인을 뒤로 하고 천사의 성에 가서 사진을 몇 장 찍고 성천사의 다리를 건너 다시 스페인광장 부근으로 간다. 어제와 같이 사람들이 많이 나와 계단에 앉아 있다. 어제 앉아 있던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 사람들은 오늘은 다른데 가서 앉아 있겠지. 오늘은 이만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온다. 그래도 저녁 해가 넘어 가려 한다. 오늘도 주인 아줌마가 이벤트를 마련했다. 불고기에 와인 맛있게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아픈 다리를 주무르고 내일은 나폴리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야지

일본은 기독교 신자가 1%가 안 된단다. 아마 천황이 있어 그 천황이 신적인 존재이므로 기독교가 일본인들에게 파고 들지 못하는 이유도 있겠다. 우리나라는 엄청난 기독교 신자를 보유하고 있다. 다신교를 갖고 있었던 로마가 그렇게 박해를 하던 기독교가 이렇게 까지 퍼질 수 있었다니 놀랍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보면 로마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목욕탕이 무척 발달하였고 그 목욕탕은 남녀 혼탕이었다고 한다. 남녀 혼탕이었느니 서로 벗은 모습을 보는 자체가 일상화 되어 있었을 테고 쑥스럽지도 안았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러한 이유로 남녀의 조각상이 자연스럽게 조각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조각들은 목욕탕에 주로 있었다고 한다. 목욕탕이 무척 호화스러웠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기독교가 들어 오고 기독교가 로마에서 종교로 인정 받으면서 남녀 혼탕도 없어지고 목욕탕에 있던 그 수많은 조각품들도 다 없어졌다고 한다. 성서에 나오는 에덴의 동상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워하며 옷을 입기 시작한다는 그 이야기의 한 부분에서 발단이 되었겠지. 우리나라에 유교가 들어 오면서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사상과 같다고 할까. 그 조각품들 중에 남은 것만이 지금 볼 수 있는 조각품이다. 그리고 로마 유적들은 성당을 건축하기 위하여 뜯겨져서 성당의 재료로 쓰였다고 한다. 기독교가 로마에 끼친 영향은 문화재 보호 측면에서 보면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Posted by 날으는종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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