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남 1녀와 부모등 총 9명으로 구성돼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작은별가족. 이들 이전에도 가수 이난영, 작곡가 김해송 부부의 자녀들이었던 김시스터즈, 김보이스가 있었지만 전 가족 9명이 한 팀으로 구성돼 인기절정의 활동을 벌였던 가족음악그룹은 국내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작은별가족은 밝은 분위기의 노래뿐 아니라 멤버 모두 5∼6개의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뤘던 탁월한 재능으로 ‘한국 최초, 세계 유일의 가족 연주단’으로 불리며 화제를 몰고 왔었다.
단장은 5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당선된 영화감독이자 방송드라마 작가출신 강문수씨. 그는 예그린합창단에서 ‘로미오와 쥬리엣’등 여러 오페라의 주연 소프라노로 활약했던 서울음대 성악과 출신의 아내 주영숙 씨와 함께 음악을 즐기기 위해 가족음악단의 꿈을 품었다. 모체는 자신들이 운영했던 작은별 예술학원. 이 학원에서 68년 아동극단을 만든 것이 발단이 되었다. 하지만 자녀들의 뛰어난 음악재능을 확인하곤 1970년부터 전 가족음악그룹을 준비했다. 첫 선을 보인 것은 4년 후인 74년 3월, 한국판 ‘사운드 오브 뮤직’ 격인 영화 ‘작은별’. 강문수 씨가 직접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았던 이색적인 가족영화였다. 영화가 좋은 반응 속에 성공을 거두자 일본 후지TV에 초청을 받고 청와대에서 국악연주회도 가졌다. 성공을 예감한 부모는 본격적인 활동을 결심했다. 하지만 실력을 연마하기 위해 3년간 미8군무대의 활동을 선택했다. 평일에는 자녀들이 모두 귀가하는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토요일은 오후부터 일요일 저녁때까지 가족 모두 한자리에 모여 음악연습을 통해 가족애와 팀웍을 키워나갔다. 당시 작은별가족이 소유했던 악기는 50여개. 이 많은 악기와 많은 가족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마이크로 버스를 구입해 자가용으로 이용했다.
최고 스타는 막내 강인봉. 깜찍한 용모의 그는 이미 3살 때 영화 ‘세월이 가면’으로 데뷔한 이래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 100여 편의 영화와 ‘민비’등 10여 편의 TV드라마에도 출연해 사랑받았던 아역 스타출신이었다. 그는 맑고 청아한 보컬 뿐 아니라 바이얼린, 드럼, 양금을 주로 연주하고 악기라면 못 다루는 것이 없었다. 또 초등학교 과정부터 독학으로 공부해 고입과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했고 14살 때는 최연소로 사법고시에 응시해 ‘신동’소리를 들었던 천재였다. 리드 보컬은 MC를 겸했던 셋째 강인엽.
경동고를 졸업한 그는 바이얼린, 플루트, 트럼펫, 단소, 대금연주로 미8군 무대에서 가장 큰 인기를 얻었던 재주꾼이었다. 전체 멤버 소개를 하면 첫째 강인호는 한양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클라리넷, 섹서폰, 피리에, 둘째 강인혁은 경희대 작곡과 출신으로 작편곡은 물론 기타, 첼로, 해금연주에 능했다. 아역배우 출신인 넷째 강인경은 바이얼린, 기타, 베이스기타, 가야금연주가 대단했고 다섯째 강인구는 트럼본, 벨, 드럼, 아쟁의 전문가였다. 다섯 살 때 일본 후지TV에서 피아노독주를 했던 여섯째 강애리자는 영화 ‘팔도강산’등에 출연했고 피아노, 오르간, 플루트, 설장고춤에 뛰어났던 홍일점이었다.
일반무대 진출은 76년 TV만화영화 주제가 모음집인 ‘어린이왕국’ 1, 2집 음반을 발표하면서 부터. 당시 유명했던 만화주제가 ‘마징가 제트’ ‘우주소년 아톰’등은 바로 막내 강인봉의 노래였다. 전례가 없는 전가족연예그룹에 대한 대중적 호기심은 대단했다. 하지만 성공의 확신을 가지고 이들을 지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20세기 프로덕션 대표 이춘희씨는 처음으로 용기를 냈던 제작자. 그의 결심으로 77년 9월 성음제작소를 통해 총 13곡이 수록된 데뷔음반 ‘작은별 한가족모음’을 발표했다. 타이틀곡은 잭슨 파이브의 노래를 번안해 강인봉이 노래한 ‘나의 작은 꿈’과 가족 합작품인 ‘너 나의 미소’. 첫 음반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폭넓은 대중이 수용할 수 있는 밝고 부드러운 동요풍의 노래가 주류를 이뤘다. 이때부터 TV프로에도 출연을 했다.
크리스마스캐롤 음반과 더불어 가족 리사이틀을 개최한 작은별가족은 한국의 오스몬즈 가족에 비유되며 특히 막내 강인봉은 슈퍼스타급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78년 3월에 맏형 강인호부터 인혁, 인엽, 인섭등 4형제가 같은 날 해군 낙도 홍보단에 입대하면서 사실상 활동 정지에 들어갔다. 공백기를 가진 뒤 첫째와 둘째가 제대를 한 80년 8월부터 신곡준비와 함께 팀을 5인조로 재정비하고 홍일점인 강애리자를 리드보컬로 내세웠다. 신곡은 강인호 곡 ‘청바지 아가씨’. 형제간에 빈틈없는 하모니로 밝고 경쾌한 느낌을 전달한 이 노래는 강애리자를 새로운 스타로 탄생시키며 젊은 층에 크게 어필했다.
이후 81년 2월 모든 가족이 합류했다. 컴백무대는 82년 5월, 50여일 간의 일본 순회 자선공연. 한일문화협회 창립25주년 기념 행사였던 이 투어를 통해 일본TBS TV출연을 시작으로 동경 나고야 오사카 시모노세끼 후꾸오카 히로시마 도바다 등 일본 전역을 순회했다. 자신들의 히트곡과 한국민속음악과 흘러간 노래, 팝송, 록, 재즈 그리고 일본가요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소화력을 선보여 일본 관객들의 찬사를 받았다. 귀국 후, 작은 별가족은 영동호텔 나이트클럽과 계약을 맺고 직업적인 고정무대를 마련했다. 또한 지구레코드와 전속 계약해 본격 활동재개를 선언했다.
[추억의 LP 여행] 작은별가족(下)
7인 7색, 인생행로 달라도 음악사랑은 계속된다
본격 활동을 다시 시작하면서 부친은 매니저로 모친은 의상과 헤어 스타일을 돌보는 코디네이터 역할로 전환하고 7인조 보컬 그룹 ‘작은별’로 전환했다. 연주 포지션도 전문화를 꾀했다. 리드 보컬은 인봉과 애리자가 맡았다. 개성이 강했던 멤버들은 모두 별명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공학박사, 둘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셋째는 강고집, 넷째는 강삿갓, 다섯째는 잠꾸러기, 여섯재 애리자는 도널드, 막내 인봉은 못하는 것이 없고 안 끼는 데가 없다 하여 감초라 불렸다. 나이차가 컸던 지라 멤버들은 세대차로 인한 음악적 지향점이 달랐다. 첫째와 둘째는 노래의 상품성을 강조했고 넷째부터는 순수성을 중시해 격론이 빚어졌지만, 이때마다 셋째 강인엽이 중재자 역할을 했다.
1982년 12월, 새 앨범 ‘하소연’을 발표하며서 발라드에서 록까지 넘나드는 전천후 그룹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반년쯤 지나면서‘딱부러지게 말해’가 히트 차트에 올랐다. 또한 MBC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수요일 벼락 DJ 코너에 출연해 팬들의 관심을 모았다. 84년 6월말부터는 40여일 간 후꾸오카 등 일본의 10개 도시에서 순회공연을 다시 열었다. 귀국후 작은별은 일본 공연에서 가능성을 인정받은 셋째 강인엽을 처음으로 리드 싱어로 내세웠다. 막내 강인봉은 과거에 솔로 가수 활동도 했지만, 성장을 하면서 어린이 가수 이미지를 벗지 못 하는 한계를 보였기 때문. 강인엽 또한 엷은 허스키로 ‘슬퍼하지 말아요’를 발표하며 정식 솔로 가수로 데뷔했다. 음악 활동 때문에 미뤄 두었던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8년이나 뒤늦게 서울예전 방송연예과에도 입학했다.
85년 6월, 작은별가족은 강남구 신사동에 ‘작은별 문화센터’를 설립해 연예 산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강인엽의 솔로 독립, 강애리자의 결혼 문제 그리고 한양대 연극영화과 출신의 다섯째 인구와 고려대 신방과 대학생인 막내 인봉이 이영웅, 안영훈, 곽윤종과 함께 5인조 록 그룹 ‘벌거숭이’를 결성해 앨범을 발표하자 잠정 해체 소문이 나돌았다. 강인봉, 강인구가 주도한 록 그룹 벌거숭이는 비록 단 한 장의 음반을 남기고 해체되었지만 ‘삶에 관하여’란 곡은 록 마니아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룹 해체 이후 강인구는 MBC TV 베스트셀러극장의 여러 단편극에서 배경 음악 작곡가로 변신해 재능을 인정 받았다. 86년 그는 영화 음악에도 진출, 심재석 감독의 ‘뛰는 자 나는 자’의 주제가 ‘사랑 서리’를 강인엽에게 부르게 했다. 드라마, 영화 음악의 젊은 귀재로 평가 받은 그는 88년 6월 김응천 감독의 뮤지컬 영화 음악도 맡았다. 이후 강인구는 95년 한국방송대상에서 SBS TV 자연다큐멘터리 ‘버섯, 그 천의 얼굴’과, ‘아시아 4만km’로 최우상과 작품상을 수상하고 강남구 신사동에 녹음스튜디오를 열었다. 강인엽은 ‘침묵’등 신곡과 함께 동생 강인구에게 ‘모델 아담’, ‘ 바다의 이야기’등을 받아 두 번째 독집을 발표했다. 막내 인봉은 음악 활동을 접고 학업에만 전념했다.
당시 첫째는 컴퓨터회사에 취직했다. 둘째와 셋째는 작은별문화센터를 운영했고, 여섯째 강애리자는 한양여전 도예과 졸업 후 86년 10월 결혼과 함께 활동을 중단했다. 하지만 강애리자는 2년만에 신곡 ‘분홍 립스틱’을 발표해 KBS TV ‘가요톱10’10위권에 오르며 재기했다. 인기 가수가 된 강애리자 덕에 젊은 여자들이 분홍 립스틱만을 찾자, ‘분홍 립스틱’ 선풍마저 몰아 닥쳤왔다. 90년 고려대 신방과를 졸업 후 공채로 들어간 제일기획에서 오디오광고 기획일을 하던 막내 강인봉은 91년 1월 연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영파여중 교사 이지현과 결혼식을 올렸다.
92년 1월 작은별가족은 다시한번 화제가 되었다. 이번엔 아버지 강문수씨가 주인공. 그는 주연, 극본, 감독의 1인 3역으로 1년 6개월만에 영화 ‘어허 어이 어이가리’를 완성해 대종상 특별상을 수상했던 것. 강씨는 갱부 감독인 오감독역을 맡고 아내 주영숙과 친정부모와 맏아들 인호를 제외한 6명의 자녀들과 손자손녀 30명이 단역으로 참여하는 등 가족의 절대적인 지지속에 ‘3대가 만든 가족영화’로 모든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한동안 직장생활에 전념하던 막내 강인봉은 회사에 음반 제작 오디오 파트가 생겨 사이버가수 류시아과 가수 김원준을 발굴해 그의 2, 3집 앨범제작에 참여했다. 그러다 음악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 해 오랜 공백을 깨고 94년 록 그룹 ‘벌거숭이’의 멤버였던 곽윤종과 테크노 듀엣 ‘키키’를 결성했다.
자신은 기타와 섹소폰, 일본 뮤즈음대에서 재즈 피아노를 전공한 곽윤종이 건반을 연주해 타이틀곡 ‘다른 모습’등 11곡의 퓨전 곡을 담아 앨범을 발표했다. 하지만 큰 반응을 얻지 못하고 97년 그룹 ‘세발 자전거’를 재결성해, 99년 1집 ‘꿈이었으면’, 2000년 2집 ‘세상살이’를 발표하는 등 독자적인 음악 기반을 다져 나갔다. 그 결과 2001년 남성 3인조 퓨전 포크 록 그룹 ‘자전거를 탄 풍경’을 결성하며 재탄생했다. 드럼, 기타, 하모니카 등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는 송봉주, 김형섭 등 자탄풍 멤버들의 맏형으로 활약하며 탄탄한 지지층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현재 일본 중국등 해외 진출을 꾀하며 쉼 없는 라이브 활동을 여전히 벌이고 있는 그는 ‘작은별 가족’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 가고 있는 셈이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