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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행진


Y대 철학과의 학생들인 주요 등장인물들이 군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는 장면에서 이 영화는 시작한다. 군의관(윤일봉)의 호령에 바보처럼 우물쭈물하는 주인공 병태(윤문섭)와 영철(하재영). 영철은 '병종불합격'되고 병태는 '갑종합격'된다. '갑종합격'을 복창하는 병태의 모습이 클로즈업으로 정지 화면이 되면서 영화의 제목이 떠오른다. 그리고 서서히 나타나는 배경음악. 아, '고래사냥'이 아닌가!

이후로 영화는 주인공 병태와 영철을 중심으로 70년대 대학생활의 여러 단면들을 가벼운 에피소드를 다루듯이 코믹터치로 전개된다. 그러나 장면 전환과 리드미컬한 줄거리의 전개과정은 그야말로 한국영화 같지가 않을 정도다. 신체검사 장면에서 두드러진 대담한 클로즈업, 간간이 보이는 카메라의 180도 회전, 급격한 틸팅과 패닝, 그리고 두드러진 몽타주기법 (주로 두 주인공을 교차시켜 보여줌)과 후반부 병태가 캠퍼스를 걸어가는 데서 나오는 롱 테이크, 여주인공이 빗속에서 카메라를 향해 갑자기 노란 우산을 펴드는 장면, 비칠듯 말듯한 유리를 사이에 두고 남녀 주인공이 샤워하는 장면들은 지금의 눈에도 한국영화치곤 꽤 신선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병태와 영철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뇌와 갈등은 처음부터 동일한 맥락에 위치해 있다. 밝고 순진무구한 듯이 보이는 젊은이다운 행동들의 저변에는 깊은 암울함과 좌절이 깔려 있다. 그것은 중간중간 그들의 자기비하적인 대사와 공권력(경찰로 대표되는), 기성세대(교수로 대표되는)와의 끊임없는 마찰과 갈등을 통해 나타난다. 순진하고 선량하며 기인적인 모습을 보이는 말더듬이 영철. 그는 이상주의자이다. 그의 꿈은 '삼등 완행열차를 타고 동해로 가서 가슴 속에 신화처럼 숨쉬는 고래를 잡아오는 것'이다. 많이 듣던 소리 아닌가? 그 가슴 저린 노래가사의 70년대적 원형이 그에게서 나타나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동해바다에서 사는 고래'의 의미는 바로 '자유' 그것이 아닌가? 그는 부유한 부모의 품을 뛰쳐나와 집도 없이 살아가면서 '자가용'이라고 부르는 자전거를 늘 타고 다니는, 한마디로 '자유분방이 넘치는' 인간형이다. 아무리 70년대라 하더라도 그와 같은 인간형은 소외의 상징이었나 보다. 사회로부터의 소외.

그에 비하면 병태는 보다 평균적인 '보통 대학생'을 상징한다. 때론 흥분하고 튀다가도 다시 좌절하는, 그러면서도 결국엔 그것을 익히고 적응해나가는. 하길종 감독은 보다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그를 비춰주는 듯 하면서도, 결국은 개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인물로 그리고 있다. 사회적 틀과 제약에서 방황하다가도 남들과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이들의 저변에 깔려있는 좌절과 제약의 실체는 무엇이었던가? 장발 단속, 통행금지, 교통위반에 대한 단속 등으로 간간이 나타나다가 결국에 가서는 '무기한 휴교조치'와 '군입대'로 결말을 짓는 그 거대한 억압의 실체. 그것은 70년대의 청년문화를 거품같은 낭만의 구가로 들뜨게 만들다가도 그들을 다시금 필연적이고 예정된 속박으로 내모는, 권력과 지배의 메카니즘 속으로 무자비하게 편입시켜 버리는 공권력의 극한체, 곧 '유신'이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그런 메커니즘에 종속된 한계로서의 의미를 가지니 그 표현에 대한 벽이 처음부터 명백한 것도 새삼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제목에서부터 나타나듯 스스로에 대한 '바보, 쪼다'라는 자기비하와 멸시, '네 꿈은 갈매기의 꿈일 뿐이야'라는 병태의 여자친구 영자(이영옥)의 대사. 그리고 응원전으로 수업이 중도에서 끝나자(오리지널 시나리오에선 학생들의 반일시위로 중단됨) 칠판에 남겨진 'utopia'라는 단어를 지우고, '이상국가'의 글자를 변조해 '사쿠라'로 고치는 병태와, 의도적으로 통금을 무시해 경찰서로 잡혀가서 '나에게 집은 없다'고 진술하는 영철. 그러나 이 장면들의 상징은 "영화의 의무는 부조리와 불합리를 고발하는 것"이며 "한국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가 피고다"라는 죄의식을 지니고 있던 하길종의 저항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찌 생각하면 이 영화 자체가 그런 식으로 시종일관 톡 쏘는 듯한 풍자와 새디즘의 기제인 것이기도 하다.

결말이 예정된 자아도피의 상징이 극에 이른 것은 과대항 술마시기대회 장면이다. 맥주잔에 막걸리(!)를 담아서 열 잔이 넘도록 퍼마신 뒤 출전 선수들이 바늘에다 실을 꿰는 일련의 장면들에선 하길종의 유머감각 절정에 달한다. 어느 영화에서 이렇게 압도적인 '막걸리 마시는 모습'을 볼 것인가! 더구나 그 심사위원이 원작자 최인호와 당대를 주름잡던 코미디언 이기동인 데서는 미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그러나 영화는 급격하게 파국으로 치닫는다. 감독은 더 지체할 필요가 없다는 듯 예정된 결말을 향해 마무리를 짓는다. 영자는 병태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끝모를 좌절감에 빠진 영철은 자전거를 타고 항상 마음속에 그려오던 동해바다로 간다. 여태까지 심각하지 않게 실실 웃으며 영화를 봐 왔을 관객들을 감독은 일순간에 배신한다.

절벽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영철. 여기서 비로소 송창식의 걸쭉한 목소리로 빠른 템포의 '고래사냥'의 노래가 가사를 달고 흘러나온다. 그리고 마치 '빠삐용(Papillon)'(1973)에서의 스티브 맥퀸처럼 영철은 자전거를 탄 채로 그 광대무변한 푸른 바다 위로 뛰어내린다.

장면은 바뀐다. 머리를 깎은 병태는 입영열차를 타고 있고, 달리는 열차를 쫓아간 영자는 창문 너머로 병태와 키스하다가 헌병의 제지를 받는다. 영화는 끝난다.

무의미한 에피소드적 시퀀스의 연결 같던 중간부분은 훌륭한 수미상관에 의해 연결된다. 신체검사로 시작해서 입영으로 끝나는 영화. 결국 70년대적 대학생활이며 청춘의 낭만이라는 것은 군입대로 상징되는 '권력의 메커니즘으로의 귀속'을 위한 유예, 준비기간일 뿐이 아닌가? 너무나 섬뜩한 구성.

그러나, 영화 중간에 나오는 영자의 대사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얜 못하는 말이 없어. 니가 나하고 결혼해? 넌 나하고 동갑이쟎아. 넌 군대도 갔다와야 하고 졸업하고 취직하고. 그럼 난 할머니가 돼 있겠다. 우리 엄마가 그러시는데 여자는 잘 팔릴 때 기회를 잡아야 한대. 그리고 철학과잖아. 철학과 나와서 날 어떻게 먹여살리려구 그러니?" "난 꿈이 있어." "꿈? 무슨 꿈? 갈매기 꿈?."
<유석재>

Posted by 날으는종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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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표도르 크로캅 쯤은 5초안에…
2005-08-28 15:55 | VIEW : 21,797

‘오늘, 지금!’의 자기실현으로 빚은 마키아벨리안 무예 철학
사후 30년이 지나도록 인기가 식지 않는 이소룡.
무술인으로만 알려진 그가 상당한 경지의 철학도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실전무술인 절권도는 그의 철학적 과제인 자기구현의 결정체였다.
‘이소룡’은 이제 유행이 아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고전이다.

젊음과 도전, 그리고 강인함과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추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의 이름은 언제까지나 기억될 것이다.

▼운영자 알림: 이글은 이송준 도서출판 인간희극 대표(humancomedy@paran.com)가 시사월간지 신동아에 기고한 것을 요약한 것입니다. 전문은 현재 발매중인 신동아 9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소룡이살아 있다면 올해로 65세가 된다. 환갑을 훌쩍 넘어선 그의 모습은 어떨까? 두루뭉실 살이 붙은 몸집,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 깊게 팬 주름….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의 늙은 모습은 이렇듯 상상하기조차 싫다. 그는 여전히 푸른 기운을 내뿜는 젊은 모습 그대로 우리 곁에서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소룡이 말 그대로 ‘급사(急死)’한 것이 1973년, 올해로 32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요즘도 인터넷 인물 검색순위 상위권에 올라 있고, 잊을 만하면 세계 각국에서 그에 관한 기사가 쏟아진다.
지금 당장 아무 포털 사이트에 가서 검색창에 ‘이소룡’이라고 써보길. 최근에 씌어진 글이 오늘 아니면 어제 날짜일 테니까. 심지어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종격투기 관련 게시판에서 표도르나 크로캅 같은 최강의 격투기 고수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자칭 ‘격투기 전문가’들의 상세한 해설과 함께.

‘이소룡의 스피드라면 표도르도 5초 안에 끝낼 수 있다’ ‘이소룡의 펀치 강도는 타이슨의 1.5배쯤 된다’ ‘이소룡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왜소한 체구 때문에 지금의 파이터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살아서 한 세대, 죽어서 한 세대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소룡. 그러나 그는 살아서 한 세대, 또 죽어서도 한 세대에 존재한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소룡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는 이유는 뭘까.

죽은 지 32년이 지나도록 자신을 평온하게 잠들게 내버려두지 않는 ‘우리’에게 이소룡은 과연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환상이나 이미지를 좇지 않고 바로 지금의 삶, 실재하는 가치를 추구했던 그의 철학을 떠올려볼 때 아마도 그는 그리 유쾌한 기분만은 아닐 것이다.

‘아니 갑자기 웬 철학?’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모르는 사람은 통 몰랐겠지만, 이소룡은 워싱턴주립대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틈날 때마다 다양한 철학서를 열성적으로 읽었던 독서광이다.

특히 도교와 선불교, 명상철학에 조예가 깊어 이와 관련된 독창적인 사상을 피력한 저작물을 남긴 철학자이기도 하다. 동양철학에 정통한 도올 김용옥 선생도 이소룡을 두고 ‘퍽 깊이 있는 사상가’라고 평했을 정도니 그만 어리둥절함과 의구심을 거두시라.

여기 당신들이 잘 안다고 생각하는 한 남자의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가 있다.

원래 꿈은 의사
이소룡, 아니 이진번(李振藩·이소룡의 본명)은 1940년 11월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홍콩의 경극 배우이던 아버지 이해천이 식구들을 이끌고 미국 순회공연을 하던 중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발이 묶이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원정출산’을 한 셈이다.
이소룡의 영어 이름인 ‘브루스(bruce)’는 미국 시민권을 발급받기 위해 출생신고를 하는 과정에서 병원 분만실 간호사가 급조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브루스 리’라는 이름이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니 이름 모를 간호사의 작명 솜씨가 그리 나빴던 것 같지는 않다. 뜻하지 않게 길어진 이소룡 일가의 미국 생활은 1947년 이소룡이 일곱 살이 되던 해 가족이 모두 홍콩으로 돌아오면서 끝이 난다.

유년시절의 이소룡은 잘나가는 말썽꾸러기의 모습이다. 아버지의 인맥 덕분에 여러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했는데 ‘세로상’이라는 영화에서 ‘이소룡(李小龍)’이라는 예명을 얻은 이후 줄곧 이 이름으로 활동한다. 꽤 알려진 아역스타였던 데다가 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서 태극권을 배우고 13세부터는 영춘권의 대가인 엽문으로부터 쿵푸를 배운 그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들과 싸움을 벌였다. 천성적으로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 그는 철저한 싸움꾼 기질로 골목대장 노릇을 제대로 했다. 거울 앞에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멋을 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아이, 홍콩 차차 댄스 콘테스트에서 우승할 정도로 끼가 많은 아이였다. 1959년 19세의 나이로 혈혈단신 미국행을 결심한 이소룡은 자신의 앞날에 대해 자못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뜻밖에도 그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당신을 전혀 모르는 제가 이런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을 무례라고 생각지 말아주세요. 먼저 제 소개를 드릴게요. 저는 내년에 고등학교를 마치면 미국으로 건너갈 예정입니다. 의사가 되는 게 제 소망인데요, 그 길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의사가 될 수 있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저는 그 분야에 대해선 눈곱만큼도 아는 게 없는데, 그래도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의사가 될 수 있겠죠?’

알려지지 않은 조언자에게 보낸 이 편지를 보면, 이소룡은 말썽 많던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미국에 가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미국의 주류사회에 정착하고자 굳게 맘을 먹은 듯하다.

그가 의사의 꿈을 접고 워싱턴주립대 철학과를 택한 이유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어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전공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지도교수는 ‘너같이 캐묻기 좋아하는 사람은 철학을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말했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철학은 너에게 대답해줄 거야.”

“내가 철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은 어린 시절 나의 호전적인 성격과 무척 관련이 깊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던지곤 했다. ‘승리 뒤에는 무엇이 오는가’ ‘사람들은 왜 그토록 승리를 갈망하는가’ ‘영광이란 무엇인가’ ‘영광스러운 승리란 어떤 것인가’….”

‘승리 뒤에는 무엇이 오는가’
이소룡은 쿵푸를 널리 알리기 위해 미국 각지에 쿵푸 도장을 운영할 계획을 세우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한다. 미국에서 태권도 마스터로 인정받는 이준구 사범과의 우정은 이처럼 같은 꿈을 꾸던 젊은 무도인으로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영화는 따로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미국 액션영화 시장에서 무예영화라는 완전히 새로운 트렌드를 만드는 것이다. 아마도 권총잡이들의 무용담보다 훨씬 재미있고 흥미로울 것이다. 서부영화에서는 오로지 총만 다루지만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다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육체로 표현될 것이다.”

그가 연기에 대해 남긴 글들을 읽어보면 또다시 전율이 느껴진다.
“20년이 넘는 배우 생활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배우는 죽도록 힘들게 일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것을. 이 사실을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육체와 영혼을 사로잡는 자기표현의 예술가가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에게 배우란 ‘그 사람이게 하는 모든 것의 합’이다. 인생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이해력, 특유의 취향, 행복과 고난의 경험, 집중력, 교육배경 등 그 사람이게 하는 모든 것이 합쳐져 나오는 것이 바로 연기다.”

용의 기운과 같은 자기실현 욕구
그는 1973년 ‘용쟁호투’ 녹음 작업 직후 여배우 정패의 집에서 쓰러져서는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사망원인은 특정 약물에 대한 과민증으로 인한 뇌수종으로 밝혀졌지만 정패의 집에서 죽은 것을 두고 복상사했다느니, 아들 브랜든 리까지 이어진 죽음의 고리를 두고 집안에 씐 저주 때문이었다느니 소문이 많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마지막 숨쉬는 순간까지 자기실현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던 한 순수한 영혼에 대해 산 자들이 덧붙인 군더더기일 뿐이다.

이소룡은 스스로 철학으로 계몽됐다고 말할 만큼 다양한 철학사상을 열성적으로 탐구했다.
그의 서재에는 동서양,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철학서가 빼곡했으며 바쁜 촬영일정 속에서도 틈이 날 때마다 열성적으로 책을 읽거나 순간순간 떠오르는 철학적 영감을 메모로 남겨뒀다. 특히 탐독했던 책들을 살펴보면 그가 지향한 철학적 이상향을 대략 짐작할 수 있는데, 노자(老子)의 도덕경,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제임스 앨런의 명상 서적 등이 그것이다.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스티브 매퀸의 회상은 이소룡이 무엇을 위해 짧은 삶을 불태웠는지 잘 말해준다.
“나는 이소룡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해 탁월한 견해를 보여준 철학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무엇보다 ‘나, 이소룡은 누구인가?’를 탐구하는 데 몰두했다. 그리고 앎을 통해 새로운 지식으로 자신을 확장하려 했다. 이소룡과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장시간 토론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하곤 했다.

실제로 이길 수 있는 싸움기술
이소룡은 자신의 철학적 깨달음과 무예기술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가 남긴 수많은 철학 아포리즘은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 진리의 핵심을 정확하게 제시하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방식으로 생각을 진전시키게 자극한다. 주로 아포리즘이란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남긴 것은 ‘거짓 스승은 화려한 말을 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죽음이 두렵지는 않다. 나는 내 삶을 살아갈 것이고 멈추지 않을 것이며 전진할 것이다. 비록 내가 품은 모든 야망을 이루지 못한 채 언젠가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나는 내 모든 성의와 능력을 다 바쳐 내가 원하는 것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보스니아에 세워지는 이소룡 동상
올해 홍콩에서는 11월27일 이소룡 탄생 65주년을 맞아 높이 2m 정도의 이소룡 동상이 세워진다고 한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이소룡 동상을 세우겠다고 발표한 도시가 있다.
뜻밖에도 민족·종교 갈등이 끊이지 않는 보스니아의 모스타르시다. 모스타르시 시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이소룡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간디를 제치고 보스니아의 모든 민족으로부터 환영받는 동시에 민족간의 연대를 상징하기에 적절한 인물로 뽑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스타르 시민은 이소룡을 우정과 고귀함, 정의의 상징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이는 이소룡이라는 인물이 전세계적으로 얼마나 폭넓게, 그리고 얼마나 촘촘하게 강인한 인상을 남겼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서구인에게 각인된 그의 이미지는 너무도 강렬해 그들의 동양에 대한 인식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경제대국 일본의 위상을 능가한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미 한 세대가 지나간 그의 빛바랜 영상을 보는 새로운 세대 역시 이전 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게 이소룡을 소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소룡이라는 유행의 주기는 점점 촘촘해지고 있다. 이쯤 되면 그것은 이제 유행이 아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고전이다. 젊음과 도전, 그리고 강인함과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추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소룡, 그는 영원할 것이다.
글 = 이송준 도서출판 인간희극 대표(humancomedy@paran.com)
Posted by 날으는종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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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포크 앨범 Vol. 11: 바보들의 행진
신세계(SO 0054), 1975

김필호 antioedipe@hanmail.net | contributor

바보 행세 뒤에 숨겨진 통렬한 시대 정신

1975년에서 1983년이라는 10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한국의 대학생 수가 거의 네 배 가량 늘어나 전 인구의 3%에 육박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그게 실은 농사 짓는 부모들이 팔아치운 소 뼈다귀 위에 쌓아올려진 '교육 기적'임을 빠뜨리지 않는다. 이 기간은 또한 하길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으로 시작해서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을 거쳐 김신의 소설 [대학 별곡]으로 마감되는 캠퍼스 낭만주의의 전성기이기도 하다. 왜 하필 낭만주의였을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고등 교육의 팽창으로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초기의 이 준(準)지식인층은 노동과 가족적 의무로부터 당분간 면제되면서 자유 재량에 맡겨진 시간을 갖게 되었지만, 그걸 무슨 목적을 위해 어떻게 써야 할 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구상이 서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전문 직종으로의 진출이 보장된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에게는 '대학 이후'를 미리 보여줄 만한 선례조차 없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왜 그 영화와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철학과 아니면 국문과에 다니지 않았던가). 고등 교육을 받는 대학생들을 '바보'라고 부른 영화 제목의 역설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멍청해지고 마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병태: 나에겐 꿈이 있어.
영자: 꿈? 무슨 꿈? 갈매기 꿈?

긴급 조치와 휴교령을 통해 더더욱 늘어난 대학생들의 '자유' 시간이 표상하는 이율배반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탄압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재영이 분한 영철이 교정에서 담배를 피우다 교수로부터 따귀를 얻어맞는 장면이 시사하듯, 억압은 공공 영역을 넘어 사회의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었고, 그로부터 '탈주'하려는 젊은 몸부림은 영화의 주요한 테마를 이룬다. 장발 단속을 하는 경찰관에게 쫓겨 거리와 육교 위를 달아나는 장면, 그리고 그 때 베이스 기타 및 베이스 드럼과 하나되어 귓전을 네 번 때리는 송창식의 '왜애 불 러!'란 외침과의 결합은 일종의 심오한 해석을 촉발시킨다.

경관이 용의자를 '이봐, 거기!'하고 불러 세우는 상황은 프랑스 맑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Louis Althusser)가 제창한 이데올로기 이론의 핵심적인 사례로 등장한다. 이른바 호명(呼名)이라고 불리는 이 무의식 메커니즘은, 음악 용어에 빗대어 말하자면 일종의 주객전도된 호응(call and response)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배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질서를 내면화한 개인 주체(subject)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제시된다. 그렇다면 지배 질서, 그 이데올로기의 균열은 호명이 제대로 된 응답('예, 저요?')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될 것이고, 응답을 거부하는 것은 능동적인 저항을 의미할 터이다. 따라서 탈주 장면 위에 더해지는 '마음 없이 부르는 소리는 안 들려... 이제 다시는 나를 부르지도 마!'라는 송창식의 일갈은 송곳마냥 날카로운 비판과 저항의 톤을 싣고 귓전을 파고든다. 동시대를 풍미한 신좌파 이론과 청년 문화는 이렇듯 예기치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목소리를 통해 조우하는 것이다.

"왜 불러"의 통렬함은 송창식의 트로트/뽕짝 기행이 다다른 정점이다. 목소리를 대신해서 기타와 오르간이 코러스-버스의 멜로디를 번갈아 맡는 연주곡 버전을 들어 보면 완연해지는 "왜 불러"의 '왜색'은, 한편으론 엄청난 대중적 히트에 기여한 반면, 다른 한편으론 탄압의 표면적 구실을 제공하기도 했다. 왜 하필 뽕짝이었을까? 이 시기 송창식의 또다른 역작들인 "한번쯤"이나 "피리 부는 사나이"가 입증하듯 이는 일회성에 그칠 만한 풍자나 아이러니가 아니었고, 또한 그의 음악적 야심과 재능에 비추어본다면 단순한 상업적 고려였다고 치부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그는 구태의연해진 형식 속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찾아내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점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트로트 가락에 실린 그의 신선한 서사적 실험이다. "한번쯤"에서 1절 가사와 2절 가사 사이에 이루어지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시점 전환은 박진감 있게 교차되는 심리 묘사와 더불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댓구와 운율로 송창식의 가사를 문학 작품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고도로 상징적이고 정치적 해석의 여지가 다분한 독일 하멜른(Hameln) 지방의 전래 우화에서 영감을 얻은 "피리 부는 사나이"는, 우회적으로나마 성(性) 해방이라는 당대 청년 문화의 주요 테마를 환기시킨다. 정도와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언급한 세 곡에 공통적으로 깔려있는 육체적 욕망과 유혹의 분위기, 권력의 언어를 빌어 말하자면 그 '저속함'은 통기타 포크가 감내하기에는 어려운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바로 그런 감성을 담아내기 위해 송창식은 뽕짝으로 눈을 돌린 것이 아닐까? 김민기가 "종이연(혼혈아)"이나 "기지촌"에서 척박하고 너저분한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블루스를 끌어다 쓴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

뽕짝-포크 혼종 시도는 양희은이 부른 "산장의 여인", "부모"(1977)나 전영의 "어디쯤 가고 있을까"(1977), "서울 야곡"(1978) 등으로 한동안 지속되었다. 가사, 목소리, 창법 등에서 '포크 가수가 부르는 뽕짝입네'를 분명히 하고 넘어가는 이 곡들은, 순수하고 고결하기만 한 포크 음악으로부터는 얻을 수 없는 정서적 효과들을 뽕짝으로부터 착취하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 효과들 중 하나는 아마도 애수(哀愁)일 텐데, 이미 "상아의 노래"나 "딩동댕 지난 여름" 같은 애수띤 곡들을 불렀던 바 있는 송창식은, 여기서는 김상배의 곡 "날이 갈수록"으로 그 효과를 재현한다. 영화에서 치기어린 낭만조차도 진이 다 빠져 버린 주인공들의 애수를 토로한 이 노래는, 적어도 산울림의 "청춘"(1981)이 나오기 전까지는 젊음의 덧없음을 가장 절절히 한탄하는 노래로 꼽힐 것이다.

무자비한 검열로 30분이 넘게 잘려나간 탓에 영화는 때로 줄거리의 앞뒤조차 맞지 않고 중구난방이지만, 독특한 에피소드를 이루는 인상적인 장면들과 음반에 실린 노래들의 조화는 실로 절묘하다. 예컨대 [쿨 핸드 루크(Cool Hand Luke)]의 달걀 먹기 시합을 은근슬쩍 지시하는 듯한 과 대항 막걸리 마시기 대회 장면은, 투 코리언스가 부른 "한 잔의 술"과 완벽한 짝을 이룬다. 이장희가 만들고 이미 [별들의 고향]에서 직접 부르기도 한 이 노래는, 그 특유의 퇴폐스러움이 물씬 묻어나는 권주가(勸酒歌)다. 동방의 빛 이호준의 전기 피아노가 만들어내는 물방울 똑똑 떨어지는 듯한 인상적인 리프로 시작한다는 점에서는 원곡과 동일하지만, 신디사이저를 아예 빼버리고 전기 기타의 개입을 최소화한 뒤 베이스 라인과 건반을 부각시킨 동방의 빛의 탁월한 연주는 김도향과 손창철의 걸찍한 목소리와 어우러져 전작을 훌쩍 뛰어넘는 주태백의 경지에 도달한다. 특히 손창철이 한참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를 흉내내다가 오르간의 글리산도(glissando)에 실려 '마시자 한 잔의 술'하는 코러스로 넘어가는 대목을 듣고 있노라면 막걸리 생각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술 얘기를 하다보니 이제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를 언급할 시점에 이르렀다. 2000년대의 오늘날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1990년대 중반까지 20여년간 대학가의 술판에서 빠지지 않던 합창곡으로서, 아마도 한국 대중 음악 사상 가장 각광받은 록 송가(rock anthem)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그 노래는 바로 "고래 사냥"이다. 시작을 알리는 군악대 풍의 행진곡 드럼은 도입부에 팽팽한 긴장감을 주는 동시에 두 가지를 암시한다. 그 하나는 성년의 문턱에 들어선 대학생-청년들 앞에 버티고 선 최종의 훈육 기관, 군대가 드리운 음울한 그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버스(verse)를 채우는 송창식의 축 처진 읊조림과 대비되는 극적인 전환의 도래이다.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 뿐이네'라는 한탄에 동감이라도 하듯 전기 기타는 벤딩을 먹어 징징거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 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 앉았네'하며 절망이 한 차례 밑바닥을 치고 나면, 곡의 분위기는 탐 탐(Tom Tom)을 다섯 번 두드리며 이루어지는 드럼 비트의 변화와 함께 급전한다. '자 떠나자'하는 송창식의 절규는 강근식의 기타와 유니즌(unison)을 이루어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선동적인 효과를 발휘하면서 듣는 이들을 흡인하지만, 이런 비등도 잠깐, 긴 '어이-'하는 긴 타령조의 탄식은 다시 애초의 가라앉은 정념을 내뱉는다.

하지만 2절로 접어들면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좀 더 단호한 태도로 '꿈'을 노래하기 시작하는 송창식의 목소리에는 점차 힘이 실리고, 밴드의 연주도 이미 바뀐 리듬을 그대로 끌고 나가면서 에너지를 증강시킨다. 무엇보다 두 번째 코러스에서는 영화의 원작자이자 노래의 작사가이기도 한 최인호가 남긴 불멸의 펀치라인(punch line)이 송창식의 통쾌한 목소리로 쩌렁쩌렁 울려퍼진다. '신화(神話)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 최인호 이래 캠퍼스 낭만주의를 건드린 수많은 작가 및 작가 지망생들은 청춘을 예찬하는 그 한구절을 찾기 위해 소설 속 주인공들을 산으로 바다로 떠나보냈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에게는 이만큼 큰 고래가 걸려든 적이 없었다. 이젠 한 번 솟구친 기운을 누그러뜨리지 않으려는 듯 기타 솔로는 코러스를 다시 한 번 되풀이하면서 피날레를 예비한다. 이윽고 마지막 코러스에 이르면, 앰프가 감당을 못하고 웅웅거릴만치 혼신의 힘이 실린 기타 애들립은 구호를 외치는 것 마냥 코러스를 반복하는 송창식의 목소리와 함께 세차게 몰아쳤다가 차차 잦아든다. 빛이 바래만 가는 그 질풍 노도의 기억과도 같이.

영화사(史)에 관해 논할 자리는 아니지만, [바보들의 행진]은 1960년대 미국의 [졸업(Graduate)]이나 [Easy Rider], 혹은 동시대 자메이카의 [The Harder They Come]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시대와 세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초기에는 전위적 예술영화를 시도했던 하길종이 '세상과 타협해'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표면상의 바보스러움 뒤에 치열한 정신을 숨기고 있다. 30년 전 영화를 만들었던 이들, 그리고 영화 속 주인공들을 얽매고 있었던 시대적 제약이 지금 와 보기에 어처구니 없으리만치 어리석은 것이었다면, 정교하게 고안해 낸 바보짓보다도 더 통쾌하게 그걸 고발하는 방법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과 웃음 덕택에 '꺼벙하게' 보인다는 얘기를 간혹 듣곤 했던 송창식이 통렬한 시대의 목소리로 등장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20021215


수록곡
Side A
1. 왜 불러 - 송창식
2. 날이 갈수록 - 송창식
3. 왜 불러 - 경음악
4. 고래사냥 - 송창식
5. 날이 갈수록 - 경음악

Side B
1. 저 꽃속에 찬란한 빛이 - 임희숙
2.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 He 5
3. 두손을 마주잡고 - 김세환
4. 창가에 홀로 앉아 - 이장희
5. 한잔의 추억 - 투코리언스

Posted by 날으는종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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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탄생 65주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오늘, 지금!’의 자기실현으로 빚은 마키아벨리안 무예 철학
이송준 도서출판 인간희극 대표 humancomedy@paran.com

사후 30년이 지나도록 인기가 식지 않는 이소룡. 무술인으로만 알려진 그가 상당한 경지의 철학도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실전무술인 절권도는 그의 철학적 과제인 자기구현의 결정체였다. ‘이소룡’은 이제 유행이 아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고전이다. 젊음과 도전, 그리고 강인함과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추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의 이름은 언제까지나 기억될 것이다.

이소룡이살아 있다면 올해로 65세가 된다. 환갑을 훌쩍 넘어선 그의 모습은 어떨까? 두루뭉실 살이 붙은 몸집,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 깊게 팬 주름….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의 늙은 모습은 이렇듯 상상하기조차 싫다. 그는 여전히 푸른 기운을 내뿜는 젊은 모습 그대로 우리 곁에서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소룡이 말 그대로 ‘급사(急死)’한 것이 1973년, 올해로 32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요즘도 인터넷 인물 검색순위 상위권에 올라 있고, 잊을 만하면 세계 각국에서 그에 관한 기사가 쏟아진다. 지금 당장 아무 포털 사이트에 가서 검색창에 ‘이소룡’이라고 써보길. 최근에 씌어진 글이 오늘 아니면 어제 날짜일 테니까. 심지어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종격투기 관련 게시판에서 표도르나 크로캅 같은 최강의 격투기 고수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자칭 ‘격투기 전문가’들의 상세한 해설과 함께.

‘이소룡의 스피드라면 표도르도 5초 안에 끝낼 수 있다’ ‘이소룡의 펀치 강도는 타이슨의 1.5배쯤 된다’ ‘이소룡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왜소한 체구 때문에 지금의 파이터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소룡. 그러나 그는 살아서 한 세대, 또 죽어서도 한 세대에 존재한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소룡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는 이유는 뭘까.

대중스타의 생명력을 결정짓는 요소는 다른 무엇보다 ‘이미지’다. 이소룡처럼 요절한 제임스 딘과 마릴린 먼로의 예를 들어보자. 제임스 딘은 ‘우울한 반항아’, 마릴린 먼로는 ‘섹시한 백치미’라는 이미지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여전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대체할 만한 이미지를 가진 스타는 이미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대중은 새로운 스타일의 반항아 리버 피니스, 키아누 리브스에 매료되면서 제임스 딘을 잊어가고, 킴 베이싱어와 파멜라 앤더슨을 소비하며 마릴린 먼로와 점차 멀어지는 것이다.

살아서 한 세대, 죽어서 한 세대

이런 점에서 이소룡은 여느 대중스타와는 구별된다. 그의 이미지를 흐릿하게 할 만한, 그와 대중의 거리를 벌어지게 할 만한 액션스타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성룡의 재기발랄한 액션이 아무리 재미있다 해도 이소룡의 괴조음(怪鳥音·기이한 새소리라는 의미로 이소룡 특유의 기합소리를 말함)을 들을 때 느끼는 전율과는 장르가 다르고, 장 클로드 반담의 발차기가 아무리 멋있다 해도 이소룡에 비하면 둔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죽했으면 얼마 전 새 무술액션 스타의 등장을 선언하면서 개봉한 영화 ‘옹박’이 32년 전에 죽은 이소룡을 염두에 두고 ‘이소룡은 죽었다’며 대중에게 재차 확인시키려 했겠는가. ‘이소룡은 죽었으니, 그것도 32년 전에 죽었으니 이제 새로운 무술스타를 맞이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정말 절박한 방식의 홍보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어쩌란 말이냐. 토니 자의 액션이 이소룡보다 화려해 보인다 한들 그의 마스크는 마냥 순진한 아이 같기만 한 것을.

(계속)

Posted by 날으는종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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