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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탄생 65주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
‘오늘, 지금!’의 자기실현으로 빚은 마키아벨리안 무예 철학 |
이송준 도서출판 인간희극 대표 humancomedy@paran.com |
사후 30년이 지나도록 인기가 식지 않는 이소룡. 무술인으로만 알려진 그가 상당한 경지의 철학도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실전무술인 절권도는 그의 철학적 과제인 자기구현의 결정체였다. ‘이소룡’은 이제 유행이 아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고전이다. 젊음과 도전, 그리고 강인함과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추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의 이름은 언제까지나 기억될 것이다. |
이소룡이살아 있다면 올해로 65세가 된다. 환갑을 훌쩍 넘어선 그의 모습은 어떨까? 두루뭉실 살이 붙은 몸집,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 깊게 팬 주름….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의 늙은 모습은 이렇듯 상상하기조차 싫다. 그는 여전히 푸른 기운을 내뿜는 젊은 모습 그대로 우리 곁에서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소룡이 말 그대로 ‘급사(急死)’한 것이 1973년, 올해로 32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요즘도 인터넷 인물 검색순위 상위권에 올라 있고, 잊을 만하면 세계 각국에서 그에 관한 기사가 쏟아진다. 지금 당장 아무 포털 사이트에 가서 검색창에 ‘이소룡’이라고 써보길. 최근에 씌어진 글이 오늘 아니면 어제 날짜일 테니까. 심지어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종격투기 관련 게시판에서 표도르나 크로캅 같은 최강의 격투기 고수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자칭 ‘격투기 전문가’들의 상세한 해설과 함께. ‘이소룡의 스피드라면 표도르도 5초 안에 끝낼 수 있다’ ‘이소룡의 펀치 강도는 타이슨의 1.5배쯤 된다’ ‘이소룡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왜소한 체구 때문에 지금의 파이터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소룡. 그러나 그는 살아서 한 세대, 또 죽어서도 한 세대에 존재한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소룡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는 이유는 뭘까. 대중스타의 생명력을 결정짓는 요소는 다른 무엇보다 ‘이미지’다. 이소룡처럼 요절한 제임스 딘과 마릴린 먼로의 예를 들어보자. 제임스 딘은 ‘우울한 반항아’, 마릴린 먼로는 ‘섹시한 백치미’라는 이미지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여전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대체할 만한 이미지를 가진 스타는 이미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대중은 새로운 스타일의 반항아 리버 피니스, 키아누 리브스에 매료되면서 제임스 딘을 잊어가고, 킴 베이싱어와 파멜라 앤더슨을 소비하며 마릴린 먼로와 점차 멀어지는 것이다. 살아서 한 세대, 죽어서 한 세대 이런 점에서 이소룡은 여느 대중스타와는 구별된다. 그의 이미지를 흐릿하게 할 만한, 그와 대중의 거리를 벌어지게 할 만한 액션스타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성룡의 재기발랄한 액션이 아무리 재미있다 해도 이소룡의 괴조음(怪鳥音·기이한 새소리라는 의미로 이소룡 특유의 기합소리를 말함)을 들을 때 느끼는 전율과는 장르가 다르고, 장 클로드 반담의 발차기가 아무리 멋있다 해도 이소룡에 비하면 둔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죽했으면 얼마 전 새 무술액션 스타의 등장을 선언하면서 개봉한 영화 ‘옹박’이 32년 전에 죽은 이소룡을 염두에 두고 ‘이소룡은 죽었다’며 대중에게 재차 확인시키려 했겠는가. ‘이소룡은 죽었으니, 그것도 32년 전에 죽었으니 이제 새로운 무술스타를 맞이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정말 절박한 방식의 홍보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어쩌란 말이냐. 토니 자의 액션이 이소룡보다 화려해 보인다 한들 그의 마스크는 마냥 순진한 아이 같기만 한 것을.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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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탄생 65주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
‘오늘, 지금!’의 자기실현으로 빚은 마키아벨리안 무예 철학 |
이소룡을 대체할 만한 이미지를 찾지 못한 대중의 끝없는 갈증은 영화제작사 ‘신씨네’가 기획한 ‘이소룡 부활 프로젝트’에서 절정에 이른다. 아예 그를 디지털로라도 살려내겠다는 것이다. ‘신씨네’ 대표 신철씨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이소룡 부활 프로젝트’의 기획 동기는 이소룡 이미지의 시장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준다. “이소룡의 파워는 톰 크루즈나 톰 행크스 같은 할리우드 특급 스타들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 이소룡이 마치 산 사람처럼 다른 배우들과 연기하면서 더 멋진 액션을 보여주는 영화라면 시장성이 어떨 것 같은가. 경쟁력이 엄청나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전세계 박스오피스가 4억2500만달러 정도는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자. 죽은 지 32년이 지나도록 자신을 평온하게 잠들게 내버려두지 않는 ‘우리’에게 이소룡은 과연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환상이나 이미지를 좇지 않고 바로 지금의 삶, 실재하는 가치를 추구했던 그의 철학을 떠올려볼 때 아마도 그는 그리 유쾌한 기분만은 아닐 것이다. ‘아니 갑자기 웬 철학?’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모르는 사람은 통 몰랐겠지만, 이소룡은 워싱턴주립대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틈날 때마다 다양한 철학서를 열성적으로 읽었던 독서광이다. 특히 도교와 선불교, 명상철학에 조예가 깊어 이와 관련된 독창적인 사상을 피력한 저작물을 남긴 철학자이기도 하다. 동양철학에 정통한 도올 김용옥 선생도 이소룡을 두고 ‘퍽 깊이 있는 사상가’라고 평했을 정도니 그만 어리둥절함과 의구심을 거두시라. 어쨌든 이소룡은 죽기 불과 3년 전부터 찍어댄 5편의 영화에서 자신이 보여준 이미지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썩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다. 그의 철학을 곱씹어볼 때 군더더기가 붙어버린 그의 이미지는 모두 제거해야 옳다. 그러나 김현이 기형도 유고시집의 발문에서 말했듯이 어떤 사람의 흔적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면 제대로 알리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여기 당신들이 잘 안다고 생각하는 한 남자의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가 있다. 원래 꿈은 의사 이소룡, 아니 이진번(李振藩·이소룡의 본명)은 1940년 11월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홍콩의 경극 배우이던 아버지 이해천이 식구들을 이끌고 미국 순회공연을 하던 중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발이 묶이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원정출산’을 한 셈이다. 이소룡의 영어 이름인 ‘브루스(bruce)’는 미국 시민권을 발급받기 위해 출생신고를 하는 과정에서 병원 분만실 간호사가 급조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브루스 리’라는 이름이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니 이름 모를 간호사의 작명 솜씨가 그리 나빴던 것 같지는 않다. 뜻하지 않게 길어진 이소룡 일가의 미국 생활은 1947년 이소룡이 일곱 살이 되던 해 가족이 모두 홍콩으로 돌아오면서 끝이 난다. 유년시절의 이소룡은 잘나가는 말썽꾸러기의 모습이다. 아버지의 인맥 덕분에 여러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했는데 ‘세로상’이라는 영화에서 ‘이소룡(李小龍)’이라는 예명을 얻은 이후 줄곧 이 이름으로 활동한다. 꽤 알려진 아역스타였던 데다가 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서 태극권을 배우고 13세부터는 영춘권의 대가인 엽문으로부터 쿵푸를 배운 그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들과 싸움을 벌였다. 천성적으로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 그는 철저한 싸움꾼 기질로 골목대장 노릇을 제대로 했다. 거울 앞에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멋을 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아이, 홍콩 차차 댄스 콘테스트에서 우승할 정도로 끼가 많은 아이였다. 1959년 19세의 나이로 혈혈단신 미국행을 결심한 이소룡은 자신의 앞날에 대해 자못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뜻밖에도 그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당신을 전혀 모르는 제가 이런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을 무례라고 생각지 말아주세요. 먼저 제 소개를 드릴게요. 저는 내년에 고등학교를 마치면 미국으로 건너갈 예정입니다. 의사가 되는 게 제 소망인데요, 그 길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의사가 될 수 있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저는 그 분야에 대해선 눈곱만큼도 아는 게 없는데, 그래도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의사가 될 수 있겠죠?’ 알려지지 않은 조언자에게 보낸 이 편지를 보면, 이소룡은 말썽 많던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미국에 가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미국의 주류사회에 정착하고자 굳게 맘을 먹은 듯하다. 사실 이소룡이 홀로 미국에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사건으로 폭력집단의 살해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을 만큼 그의 미국행은 급작스러웠고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한 채 이뤄졌다. 그러니 어린 이소룡이 가진 불안감은 대단했을 것이다. 어쨌든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그는 자신이 태어난 땅, 광활한 기회의 땅 미국에 단돈 100달러를 들고 입성한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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