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2025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이소룡 탄생 65주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오늘, 지금!’의 자기실현으로 빚은 마키아벨리안 무예 철학

시애틀의 한 직업학교에 입학한 그는 홍콩에서와는 전혀 다른 삶에 적응해야만 했다. 홍콩에서는 꽤 알려진 아역스타였지만, 미국에서 그는 백인 주류사회의 편견에 시달리는 왜소한 동양인, 식당 웨이터, 댄스 강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해야 하는 고단한 고학생일 뿐이었다. 이런 환경의 변화 속에서 자의식이 강한 이소룡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성숙했으며 동양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쿵푸 수련에 매진하게 된다. 그리고 ‘나인 나로서 살기 위한’ 그의 끊임없는 고민은 이소룡을 점점 철학이라는 학문으로 이끈다. 그가 의사의 꿈을 접고 워싱턴주립대 철학과를 택한 이유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어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전공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지도교수는 ‘너같이 캐묻기 좋아하는 사람은 철학을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말했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철학은 너에게 대답해줄 거야.”

“내가 철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은 어린 시절 나의 호전적인 성격과 무척 관련이 깊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던지곤 했다. ‘승리 뒤에는 무엇이 오는가’ ‘사람들은 왜 그토록 승리를 갈망하는가’ ‘영광이란 무엇인가’ ‘영광스러운 승리란 어떤 것인가’….”

‘승리 뒤에는 무엇이 오는가’

동양 남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쿵푸 수련에 매달린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이소룡의 유려한 발차기와 왜소하지만 강인한 육체에 호기심을 느낀 사람들은 그에게 쿵푸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고 그 중 한 사람이 훗날 그의 아내가 된 린다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동양무술하면 곧바로 일본의 가라테를 떠올릴 정도로 쿵푸와 태권도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소룡은 쿵푸를 널리 알리기 위해 미국 각지에 쿵푸 도장을 운영할 계획을 세우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한다. 미국에서 태권도 마스터로 인정받는 이준구 사범과의 우정은 이처럼 같은 꿈을 꾸던 젊은 무도인으로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다.

한편 이소룡의 할리우드 데뷔는 그의 무술시연을 눈여겨본 한 영화 제작자의 추천으로 이뤄졌다. 이미 많은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무도인이 되었지만 늘 영화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던 그는 아내 린다, 그리고 두 살배기 아들 이국호(브랜든 리)를 데리고 또 다른 모험의 땅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다. 1965년,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였다. 그 뒤로 이소룡은 여러 텔레비전 시리즈물에 출연했다. 데뷔작은 ‘그린호넷’이라는 시리즈물로 이소룡은 주인공을 보좌하는 ‘가토’라는 일본인 역을 맡았다. 이소룡은 그 무렵을 이렇게 회고했다.

“사람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최악이다. 내가 할리우드에 처음 발을 디딘 1965년, 나는 ‘그린호넷’이라는 텔레비전 시리즈물에 출연했다. 그때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 중에 정작 나, 이소룡이라는 사람은 없었고 단지 로봇 한 대가 있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나인 내가 아니었고 외부적인 안정을 이루는 데에만 골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위적인 시스템과 형식, 고정된 패턴과 정해진 조건에 대해 격정적인 반발심을 보이던 이소룡에게 할리우드의 거대한 제작 시스템은 스스로를 사람이 아닌 로봇으로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영화는 따로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미국 액션영화 시장에서 무예영화라는 완전히 새로운 트렌드를 만드는 것이다. 아마도 권총잡이들의 무용담보다 훨씬 재미있고 흥미로울 것이다. 서부영화에서는 오로지 총만 다루지만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다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육체로 표현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제작자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미국 제작사가 아닌 홍콩의 영화제작사 ‘골든 하베스트’와 함께 자신이 원하던 영화를 찍게 된다. 이소룡 신화의 신호탄이 된 영화 ‘당산대형’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홍콩의 박스오피스 기록을 모두 갈아치우며 크게 흥행한 이 영화는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 관객의 눈으로 보면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부분도 많다. 이소룡의 발차기에 날아간 상대가 창고 벽면에 그대로 형체를 남기며 쓰러지는 만화 같은 장면이 그것이다.

(계속)







Posted by 날으는종이배
|

제 1 회 mbc 대학가요제 대상팀

한글이름으로 화랑

센드페블즈 6대

5대에 김창완(산울림)이 이었다

1회 대학가요제에서

샌드페블즈는 나어떡해(산울림 작사 작곡)로

산울림은 아니벌써로 나가려고 했는데

김창완이 졸업하여 대학생 신분이 아니라

못나갔다고 한다.

Side1

1.달빛속에서(저새)
2.그곳으로
3.오직그대만을
4.너를알기위해

Side2

1.달려라
2.넌영원한소녀
3.겨울과봄
4.한오백년

이영득:leadguitar
여병섭:leadvacal
김민수:bass
김영국:drums
최광석:keyboard

샌드 페블스(화랑)
달빛 속에서(저 새)/달려라

대도(DSHR 1001), 1979

신현준 homey@orgio.net | contents planner
아마추어 그랑프리 그룹, 음반 녹음 도전기

캠퍼스 그룹 사운드가 이들보다 반 세대 위인 직업적 그룹 사운드에 비해 '창작력이 우수하다'는 세간의 인식이 있지만 그건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그건 캠퍼스 그룹 사운드들의 창작곡이 대학가요제 등에 입상하면서 대중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발생한 오해에 가깝다. 문제는 이 창작곡들이 '대학가요제에 참가하기 위해' 급하게 만든 곡이고 이들의 평소의 레퍼토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캠퍼스 그룹 사운드들 역시 직업적 그룹 사운드들 못지 않게 평소에는 록 음악을 포함한 영미의 팝송을 카피했던 '커버 밴드'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1979년에 봇물처럼 등장한 대학가요제에 입상한 캠퍼스 그룹들의 음반들에 수록된 창작곡들은? 그 곡들도 입상한 직후에 만든 곡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이전에 만들어 두었던 습작을 끄집어 내온 것도 있을 테고, 입상에 고무되어 창작의 영감이 발동하여 만들어진 것도 있겠지만... 이 앨범도 마찬가지다. 서울대학교 농대 그룹 샌드 페블스의 독집 앨범은 1977년 제 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나 어떡해"로 대상을 수상한 뒤 1년여 동안의 시기에 작곡된 곡들을 모아 연주한 음반이다.

음반을 들여다 보기 전 확인해 둘 것은 '화랑'이라는 이름은 앨범 제목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그룹 이름이라는 점이다. 이는 '기수' 제로 운영되는 캠퍼스 그룹의 특징 상 이미 활동을 접은 기수가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없었다는 사정에서 연유한다. 부제로 '샌드 페블스 독집'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는 것은 샌드 페블스라는 이름이 워낙 유명세를 탔던 사정 때문으로 추측된다.

타이틀곡인 "달빛 속에서(저 새)"는 1970년대의 좋았던 옛 시절의 하드 록의 영향이 묻어 있는 곡이다. 기타와 오르간이 주고 받는 짧은 인트로에 이어 목소리를 아래로 깐 보컬이 느릿느릿 노래하고 점차 분위기가 달아오르다가 보컬이 소리지르는 것을 신호로 기타와 오르간의 한바탕 난장이 전개되고 합창까지 가세하여 분위기가 더욱 고조된다. 빠르고 거친 측면과 느리고 부드러운 측면을 한 곡에서 구사하려는 의욕을 볼 수 있는 곡이다. 복잡한 구성을 가진 대곡인데, 의욕이 앞선 나머지 무리한 흔적이 있지만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어지는 "그곳으로"은 빠르고 명랑한 스타일이고 "오직 그대만을"은 느리고 음울한 스타일이다. 전자에서 퍼즈를, 후자에서 페이저를 사용한 기타 이펙팅도 상반된 두 스타일에 어울리게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두 곡은 스타일은 달라도 히 화이브, 영 사운드 등 1970년대 초 인기를 누렸던 직업적 그룹 사운드의 히트곡과 비슷하게 들린다. 습작으로라도 작곡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국내 그룹 사운드를 우습게 보았더라도 막상 작곡을 해보면 비슷한 결과가 나오는(그래서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경험이 있을 텐데, 아마 샌드 페블스 멤버들도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다지 신선하게 들리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샌드 페블스가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을 직접 보고 듣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앞면만을 듣고는 이들의 개성을 발견하기 힘들다. 이들의 개성이 발휘되는 곳은 뒷 면이다. "달려라"와 "겨울과 봄"같은 하드 록은 "나 어떡해"를 잇는 곡으로서 손색이 없고, 특히 "달려라"는 산울림의 망가짐의 미학을 공유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이런 면모는 민요를 하드 록으로 편곡하여 연주한 마지막 트랙 "한 오백년"까지 이어진다.

한편 "난 영원한 소녀"는 '하드 로커들의 소프트한 면'을 볼 수 있다. 포크송의 코드 진행에 기초하여 작곡된 정감 있는 멜로디와 아기자기한 코러스로 음반으로 감상하기에는 가장 좋은 곡이고, 대학가요제 본선에 출전해도 상위권에 입상할 만한 곡이다. 뭐랄까 1970년대 말의 대학생 세대의 일반적 정서를 담은 곡이라고 할까.... 아무튼 이 곡이 샌드 페블스의 후배들이 즐겨 연주하는 곡이 된 것도 이런 점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음반의 녹음 상태가 극히 좋지 않다는 점이다. 거칠고 굵게 뽑아져야 할 기타 톤이 가느다랗게 나오는 것이 대표적이고, 다른 악기나 보컬도 사정이 그리 다르지 않다. 이는 당시의 일반적 녹음 환경으로도 설명하기 힘든데, 왜냐하면 비슷한 시점에서 발표된 다른 캠퍼스 그룹들에 비해서도 이 음반의 음질이 나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샌드 페블스의 음악은 경연대회의 무대에서 열과 성을 다 하는 아마추어로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본인들이 그 이상을 바란 것 같지는 않다. 지금으로서는 '아마추어 그룹이 스스로 작곡하고 스스로 연주하여 음반까지 발매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라울 뿐이다. 직업적 스타가 되기 위한 전략만이 난무하는 지금의 대중음악계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20030922


수록곡
Side A
1. 달빛 속에서(저 새)
2. 그곳으로
3. 오직 그대만을
4. 너를 알기 위해
Side B
1. 달려라
2. 넌 영원한 소녀
3. 겨울과 봄
4, 한 오백년

'문화 > 음악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병집 - 역  (1) 2005.08.29
한영애 - 부용산  (0) 2005.08.27
조동진(上) - 겨울비  (2) 2005.08.27
조동진(下) - 다시부르는 노래  (2) 2005.08.27
영사운드 안치행(上) - 정든배  (1) 2005.08.27
Posted by 날으는종이배
|
[추억의 LP 여행] 조동진(上)
서정적 노랫말의 음유시인
작곡가로 세상에 먼저 알려져




1980~90년대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대부였던 음유 시인 조동진. 과묵한 성격의 그는 저항적 이미지보단 세상을 관조하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세상과 교감하는 포크 가수이다. 그의 노래는 마치 계절의 낭만과 자연의 향내가 그윽한 풍경화 같았다. 60년대 중반, 미8군 록 밴드의 일원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그는 주류 무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어 '가요계의 기인'으로 비쳐졌다. 비록 김민기, 한대수 등에 비해 적절한 평가를 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처럼 일관된 음악적 삶을 지켜온 아티스트는 드물다. ' 언더그라운드 가수'의 시대를 연 그의 히트곡 ' 행복한 사람', ' 나뭇잎 사이로', ' 겨울비, ' 작은배' 등은 언제 들어도 주옥 같은 곡들이다.

김지미, 정승호가 주연한 ' 육체의 길'을 만든 영화 감독 조긍하씨를 부친으로 둔 조동진은 1947년 9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영화 제작에까지 손을 댄 부친의 사업 실패로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못했다. 진공관 앰프를 자작했을 만큼 오디오광이었던 큰 형 조동완은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기타리스트 이병우와 함께 남성 듀오 ' 어떤 날'의 리더로 활약했던 조동익은 그의 동생이다. 어린 시절 그는 그림을 좋아해 화가의 꿈을 키웠다. 한국 전쟁 때 대구로 피난을 떠났다가 서울로 돌아와 방산초등학교에 다녔다. 이정선은 초등학교 후배. 이후 윤형주와 함께 대광중학을 다녔다. 대광고에 진학했을 때 아버지의 사업 부진으로 화가의 꿈을 접고 아르바이트로 음악을 시작했다. 대광고는 많은 가수들이 다녔던 학교. ' 따로 또 같이'의 이주원은 고등학교 1년 후배이고 최헌, 장계현도 동문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록 밴드를 결성, 음악회 행사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비틀즈 음악에 매료되었던 당시 쉽고 편안한 성가 같은 팝송을 주 레퍼토리로 삼았다. 하지만 밥 딜런, 피터 폴 & 매리, 레너드 코헨, 비지스 등의 포크 음악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음악에 빠지기 시작한 당시 종로나 명동의 음악감상실에서 음악 친구들을 사귀었다. 당시 그의 집에는 LP음반이 많아 당시의 다양한 팝송을 접했다. 1966년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2년 만에 중퇴를 하고 친구들과 동두천등 미8군 무대에 섰다. 하지만 친구들은 대부분 중간에 그만 두었다. 미 8군 무대 생활을 거친 후 명동 ' 미도파 살롱', ' OB'S 캐빈' 등 생음악 무대에서 록 그룹 쉐그린의 창단 멤버로 베이스기타를 연주했다. 노래 창작을 하기 위해 그룹 활동도 그만 두었다. 하지만 남 앞에 나서길 싫어했던 그는 음악 자체에만 집착할 뿐, 음반 발표나 방송 활동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68년 처음으로 ' 마지막 노래’(나중에 심의에 걸려 '다시 부르는 노래'로 개명)를 작곡했다. 이 노래는 양희은, 현경과 영애, 서유석, 이장희등 많은 가수들에 의해 불리어진 포크의 명곡이다.

연대 앞 비잔티움 다방에서 이장희를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중학교 동창 윤형주도 만났고 투 코리안스의 김도향도 알게 되었다. 다른 가수들은 세시봉, 디쉐네, 내쉬빌 같은 곳에 모여 있었지만 조동진은 지정된 곳에서 노래를 하지는 않았고 연대 앞 부근의 다방이나 카페에서 주로 노래를 했다. 당시 자작 곡을 몇 곡 만들기는 했지만 주 레퍼토리는 '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같은 팝 계열이었다. " 고등학교 때부터 습작으로 곡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비잔티움에서 노래할 때부터 뭔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969년 친구 집에서 경영하던 정릉의 청수장에서 시인 고은을 만났다. 공전의 히트곡인 두 번 째 곡 ' 작은 배'를 이 때 작곡했다. 그 인연으로 고은이 고정 출연했던 CBS의 PD 김진성을 알게 되었다. 이 시기에 조동진은 김민기를 비롯해 다른 음악 친구들과도 교류를 가졌다. 71년 포크 가수로 전향한 조동진은 기타 하나로 록 그룹들의 레퍼토리를 소화해 내면서 ' 1인의 그룹 사운드'로 불렸다.

대중에게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가수로서는 아니었다. 73년에 발매된 양희은의 <고운 노래모음 3집>에 수록된 ‘ 작은 배’의 작곡자로 먼저 세상에 등장했다. 쉽고 단순한 멜로디이지만 깊은 의미를 담은 노랫말의 매력으로 대학가와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애청되었다. "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라 많이 가지는 못했지만 명동 YWCA 청개구리 같은 곳에서 친구들이 제 노래를 많이 부르면서 퍼졌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가수보다는 몇몇 가수들한테 곡을 써 주면서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음반 녹음 때 세션을 맡게 되었다. 그는 나형구사장의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스튜디오 세션 밴드 '동방의 빛'에서 세컨 기타를 맡았다.

핑크 플로이드 등 실험적인 프로그레시브 록에 심취했던 당시 멤버는 강근식, 조원익, 이호준, 유영수, 이영림 등 쟁쟁한 멤버들. 데뷔 음반에 수록된 곡들 거의 대부분은 이 시절에 만들어 졌다. 당시 그가 작곡해 히트한 곡들은 김세환의 ‘ 그림자 따라’, 최헌과 투 코리언스의 ‘ 들리지 않네’, 윤형주의 ‘ 작은 불 밝히고’ 등등. 그는 연주보다는 작곡에 더욱 관심을 두게 되었다. 하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던 그는 1973년경에 팀에서 빠져 나와 군 입대를 했다. 이후 74년 세 살 아래 김남희씨와 결혼을 해, 그는 가정을 꾸렸다.

Posted by 날으는종이배
|
[추억의 LP 여행] 조동진(下)
<행복한 사람>으로 화려한 비상
대중음악의 격 높인 음악성


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음악 친구들이 다 사라져 버리자, 제대 후 작곡에만 전념하며 칩거했다. 가정을 꾸린 그는 별다른 직업 없이 자기 탐구의 시간으로만 일관했기에 경제적으로 궁핍한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대한극장 앞의 강 프로덕션의 강근식을 도와 CM송 작곡에 손을 댔다. " CM송을 많이 만들었는데 슬프다는 이유로 채택된 적은 없습니다." 이때 나중에 들국화의 멤버로 명성을 날리게 되는 전인권, 최성원 등을 알게 되었다.

데뷔 음반 녹음은 경제적인 이유로 시작했다. 록 그룹 ' 동방의 빛' 멤버들과 함께 이촌동 서울 스튜디오와 역촌동 오리엔트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다. 음악을 시작한지 12년만인 1978년의 일이다. 데뷔 앨범은 본의 아니게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쳤던지라 음악 완성도에서는 오히려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수록 곡 중 70년대 초반 김세환을 위해 만들었다가 그의 활동 금지로 묵혀진 '행복한 사람'이 의외의 반응을 몰고 왔다. 기획자의 의견으로 수록한 그 곡은 30만장 판매의 일등 공신이었고 가수 조동진의 화려한 탄생을 있게 했다. 곧 바로 2집 ' 어느 날 갑자기-한국ㆍ1980'이 발표되었다. 이번엔 ' 나뭇잎 사이로'가 히트했다. 인기 가수로 떠오른 조동진은 81년 10월, 숭의음악당에서 ‘ 동방의 빛'이 연주를 맡고 송창식, 정태춘, 이정선, 이광조 등이 게스트로 출연을 해 감격스런 첫 단독콘서트를 열었다.

좋은 반응 속에 콘서트를 치러냈건만 그는 오히려 소극적인 활동으로 일관했다. 좀처럼 움직이기 싫어하는 그의 기벽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신비적인 음악 활동덕에 ' 교주'처럼 따르는 팬들을 생겨났다. 당시 서울 서초동 은하아파트 그의 집엔 김수철, 강인원, 양희은, 해바라기, 들국화,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등 기성 가수들 뿐 만 아니라 음악 지망생, 대학생 팬들이 수 십 명 씩 몰려 들었다. 그들은 요란한 말보다는 침묵 속에서 설득력 있는 진실한 목소리가 담긴 노래로 대중과 교감 하는 조동진의 음악 태도를 흠모했다. 이 때의 음악 동지들은 훗날 그가 하나뮤직을 근거지로 탄생시킨 ' 조동진 사단'의 모태가 됐다. ' 노래하는 시인'으로 불리기 시작한 그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대부가 되었다.

85년 1월, 5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3집 '슬픔이 너의 가슴에'를 발표했다. 그의 녹슬지 않은 창작력을 확인시켜준 명곡은 ' 제비꽃'이었다. 이후 86년 종로3가 미리내 예술극장 개관무대의 주인공이 된 그는 87년 12월 대중 가수로는 처음으로 호암아트홀에서 단독 공연을 열었다. 하지만 다음 앨범 발표는 또 다시 5년이란 긴 세월을 요구했다. 1990년 4집 ' 음악은 흐르고'를 발표하며 그 해 말, 계몽아트홀에서 단독콘서트 ' 겨울 조동진'무대를 마련했다. 4집 이후 조동진은 자신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91년 말, 그 동안 발표한 앨범의 노랫말 35편을 묶어 시집 ' 우리같이 있을 동안에(청맥刊)'을 발표했다. 좀처럼 TV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는 92년 9월 SBS TV ' 쇼 서울 서울'프로의 ' 포크 가을 여행'이란 특집 프로에 출연을 했다. 사진 촬영의 재미에 푹 빠진 그는 음악 친구 조원익이 경영하는 논현동의 ' 하나음악'에서 음악 감독 역할을 했다. 정혜선 데뷔 음반 ‘오 왠지'와 하나 옴니버스 앨범은 그의 작품이었다. 이 당시 옴니버스 앨범에 참여한 최성원, 김광석, 장필순, 조규찬, 하덕규, 박학기, 이무하, 한동준 등 40여명의 후배 가수들과 경기도 가평에서 단합 대회를 가졌다. ' 조동진 사단'의 본격 가동이었다. 93년 3월엔 MBC TV ' 나의 노래 나의 인생'에서의 조동진 특집에 출연했다. 또 철거 위기에 놓인 야학을 돕기 위해 수원대를 시작으로 2달 동안 후배들과 함께 전국 40개 대학을 도는 순회 공연에 나섰다. 11월엔 ' 친구들에게' 등 신곡 2곡을 수록한 ' 조동진 베스트 노래 모음집'을 발표하고 12월에는 KBS 2 TV '양희은의 事?콘서트'에도 출연했다.

94년 5월, 종로5가 연강 홀 콘서트에 이어 12월에는 대중 가수에게는 좀처럼 무대를 개방하지 않았던 예술의 전당 무대에 최초로 오르는 쾌거를 이뤄냈다. 공연은 계속되었다. 95년 11월 대학로 라이브 소극장에서 일주일간, 96년 5월에는 6년 만에 발표한 5집을 발표회를 겸해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4일간 공연을 했다. 고정 팬 층이 두터워진 그의 공연들은 늘 전회 매진을 기록했다. 98년 3월 세종문화회관 공연은 음악 30년을 결산하는 무대였다. 장필순, 더 클래식, 한동준, 권혁진 등과 함께 했다. 2000년 2월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단독공연 후, 그는 '하나음악'을 운영하는 데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초동 스튜디오를 처분하고 합정동을 거쳐 일산으로 이사를 했다. 특유의 운둔적 삶으로 돌아갔다.

2004년 1월 강남 LG아트센터. 4년 만에 그는 대중 앞에 나타난 그는 휴식 없이 연주를 하는 공연 컨셉으로 건재함을 과시했다. " 노래는 아름다워야 합니다. 작게는 음악적 기법이나 유행, 크게는 사회성이라는 것도 음악의 아름다움을 희생해서는 안됩니다." 조동진은 클래식만을 선호하던 호암아트홀,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LG아트홀 등의 무대를 두루 섭렵한 최초의 가수일 것이다. 시각적 감성을 도입해 격조 있는 대중 음악을 구사하는 그에 대한 합당한 평가였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

Posted by 날으는종이배
|